[천비키의 명상24시 17] “명상 좋은 건 알겠는데 힘들어요”
그런 당신을 위한 명상의 진실과 오해
[아시아엔=천비키 본명상 코치] 강의에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명상이 좋다는 것은 알겠단다.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평안하게 한다는 것을. 단순히 그 느낌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리학적 변화가 있어 뇌파를 조율하고, 행복 호르몬을 분비하며 신경계에 리듬을 준다는 과학적인 사실도 말이다. 그리하여 신체적, 정신적으로 효과가 있기에 미국의 병원들에서는 명상을 처방전으로도 쓴다는 얘기도 내게 들려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로 명상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의 신비로움과 효과를 얘깃거리 삼는 것은 좋아하지만, 실제로 일상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필자 또한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왜 그리 좋은 것을 못 했던 것일까?
오늘은 그런 분들을 위해 ‘명상의 오해와 진실’에 대해 풀어보도록 하자.
가만히 앉아 있는 명상의 시간은 아까워요
일을 하면서 늘 효율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필자로서는 위와 같은 이유 즉 시간이 아깝다는 핑계로 명상하는 것을 꺼려왔다. 특히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명상 시간이 아깝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단 몇 초라도 신문을 읽거나 핸드폰이라도 두드리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리라. 그런데 가장 바쁘다는 세계적인 명사들, 가령 미디어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채권의 왕 빌 그로스, 허핑턴포스트의 아리아나 허핑턴, 그리고 고인이 된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은 왜 명상에 빠졌던 것일까.
핸드폰도, 컴퓨터도 계속 쓰기만 하면 열이 나고 용량이 차 속도가 느려진다. 부팅속도도, 정보입출력도 더뎌진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머리가 덥혀지고 가득 채워진 스트레스 상태에선 일을 해도 일의 능률이 제대로 날 수 없다. 그래서 뜨거워진 엔진을 냉각팬으로 식혀주고 이따금 전원을 끄듯, 우리에게도 그런 ‘텅 빔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실험을 통해 기억력과 창의력 등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훨씬 높아지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지루해요
중요한 사실은 명상은 가만히 있는 시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멍 때리고 앉아서 흘러가는 생각과 감정, 이미지들 속에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강물의 연어처럼 끝없이 자각하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본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 보면 볼수록 이제껏 내 삶을 발목 잡았던 무의식적 폭식, 흡연, 충동적 습관과 패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내가 왜 그랬지 하면서 자탄했던 행위나 감정들의 첫 시작점인 ‘생각의 씨앗’을 볼 수 있다. 분노와 우울, 좌절 등을 일으켰던 원인들을 볼 수 있게 되면 당연히 내 삶에서 원치 않던 결과들을 제거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원인을 차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등한 사고방식은 자각이다. 위대하고 고결한 인간만이 자기인식을 할 수 있고 이것이 명상적 행위다.
오히려 잡념만 많이 생겨요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 온 지인은 남한에서 가장 힘든 게 종교생활과 명상이란다. 보이는 실체인 ‘어버이 수령’을 믿어온 사람으로서, 보이지 않은 존재를 믿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기도하거나 명상을 하는 것은 더욱 곤혹스럽단다. 눈 감으면 마음이 고요하긴커녕 생각이 넘쳐나니 왜 하나 싶단다. 그녀에게 준 답은 원래 내 마음이 그렇게 복잡하고 산란했고, 이제야 가만히 있으니 알게 된 것이라고 답해주었다. 즉, 본래 마음은 그러했는데 가만히 있으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제안한 명상은 눈을 뜨고 하는 명상이었다. 생각이 들면 눈을 반쯤 열어 한 가지 사물에 고정하라고 했다. 마음이 분산될 때마다 알아차리고, 집중이 필요할 때마다 눈을 떠서 한 물체를 바라보게 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잡념에 휩쓸리지 않게 되었다.
명상을 하기 시작하면 졸음이 와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고요하면 잠에 든다”는 생각에 젖어 있다. 우리의 몸이 고요함 속에서 깨어있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고요함=잠’이라는 등식으로 습관화되어 있는 것이다. 명상의 초기단계에서는 잠에 저항하지 말라고 안내하지만 명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는 잠과의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그런 다음 잠과 깨어있음을 구분하기 시작하지만 깨어있음을 즐기게 된다. 번잡하게 움직이는 에고(Ego)가 할 일이 없을 때 무료함을 느끼고 잠을 자야 된다고 판단한다. 그 때가 바로 깨어있는 자아가 활동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대한 생각의 틀을 바꾸면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
명상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요
가끔씩 밤에 거울을 들여다본다. 또는 컴컴한 새벽녘에 거울을 보듯 내 마음을 바라보기도 한다. 낯설다. 무섭다는 생각도 흠칫 들기도 한다. 그만큼 민낯의 나를 만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자꾸 반복하여 내공이 생기다보면 어느 날, 순수한 나를 만나는 이 자체가 신비로움으로 다가온다. 이제껏 몰랐던 나를 만나는 두려움은 알 수 없는 평화로 밀려온다.
오늘도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좌를 하고 앉았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미해결의 일들, 해야 할 일 등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최근 며칠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돌보지 못했던 마음의 정원에는 잡초들이 정신없이 자랐다. 그저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부동의 자세로 이 마음을 본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내 생각은 자꾸만 처리해야 할 잡다한 일들로 달려 간다. 벌떡 일어나서 당장이라도 일을 해치우고 싶다. 그 충동을 알아차리고 호흡을 뱉어 다시 이완한다. 다리도 저리고, 몸도 들썩인다. 몇 분이 지났는지 시계도 보고 싶고, 몸도 근질거린다. 이때가 중요하다. 정신을 차리고 처음 과감하게 앉았던 명상의 의도로 돌아간다. 제멋대로 마구 자라나는 생각의 싹들을 잘라낸다. 어차피 중요한 생각이라면 또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욕심 내지 말자. 계속 딴 생각으로 치달리려는 나를 다시 호흡으로 흘려보낸다. 생각 이전의 나로 돌아가면 오히려 본래의 내게 저장되었던 생각 이전의 기억들, 경험 이전의 지혜들을 끌어낼 수 있다. 무한한 정보의 광맥은 내 본연의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