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아베 총리에게 고함

명성황후 대신 쇼다 미치코 황후가 난자당했다면 당신은?

1894년 7월 23일 새벽 4시 일본군은 경복궁에 침입하여 국왕과 왕비를 감금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하였다. 1910년의 한일병탄, 1905년 을사늑약 이전에 조선은 이때 이미 망한 것이다. 금년은 일본에 지존(至尊)을 유린당한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다음 해 일본 낭인이 조선의 국모를 자살(刺殺)하고 불태워버린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사변도 아니었다. 그것은 벌써 죽은 자를 확인사살한 것에 불과하였다.

일본군이 어찌 이리도 쉽게 조선의 국권의 상징이요 핵심인 한양과 경복궁을 장악하였는가? 동학군에 의해 전주가 실함되자 조선은 淸에 청병(請兵)하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한성조약과 천진조약을 명분으로 대병을 조선에 진주시켰다.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와 리홍장(李鴻章)에 의하여 맺어진 천진조약에서 이토가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의 출병권리를 확보한 것은 일본외교의 일대승리였다. 천진조약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문을 열었다. 그러므로 이토가 1909년 안중근에 의하여 포살(砲殺)된 것은 천주(天誅)였다.

일본 군국주의를 여기에서 막았더라면 그후 동북아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전체국력에서 청국에 턱도 없이 미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청의 예산의 8배가 넘는 배상금을 받아 국력을 충실히 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러일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정치적 외교적 공작으로 동아시아가 시끄럽다.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일본이 당연한 권리를 지금까지 보류한 것이라는 이해가 가능하며, 한국은 한·미·일 안보협력 구조에서 일본의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양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민들이 시기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일본인은 물론, 미국민도 잘 요량(料量)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이 수시로 세계적 군사적 개입을 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지원을 방패삼아 군사개입을 활성화하고, 이를 빌미로 장래의 중국, 한국, 북한의 길항(拮抗)에 끼어들고자 하는 것이 본심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세 거두, 영국, 프랑스, 독일의 긴장과 갈등관계는 1천년을 넘는다. 한국, 일본, 중국도 이와 같다. 역사문제가 따로 있고, 인권문제가 별개고, 영토문제가 별도가 아니다. 시진핑은 7월초 방한을 계기로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떼어내려는 공동외교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한국에 서운한 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를 파고들어 일본은 집단 자위권으로 미국에 더욱 다가서고 있다.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수교 50년을 앞두고 최악의 상황에 있다. 이제 그동안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문제들을 분명히 해야 할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정치적 편의로 일시적으로 봉합되어 왔던 함분축원(含憤蓄怨)의 구원(舊怨)을 풀기 위해 한일 양국민은 깊이 깊이 성찰하면서 대화해야 한다. 양국 지도자의 지혜와 국량(局量)에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오늘의 동북아는 19세기의 동북아와 다르다. 시진핑은 리홍장과 유사하다. 아베는 물론 이토와 같이 평가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나 그 역할은 막대하다. 일본 국민들은 한국민의 역사의식을 잘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만약 한국군이 황거(皇居)에 침입하여 쇼다 미치코 황후를 난자하여 (이봉창이 투척한) 이중교(二重橋)에서 불태웠다면 일본인의 원한이 얼마나 깊을 것인가?

한국민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한 120년 전 갑오(甲午)의 치욕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 이 원한을 풀지 않고서 동북아 평화의 관건인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화해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