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 “역사 돌아보는 힘 있는 나라 바랄 뿐”
[인터뷰] 대한제국 ‘마지막 황손’ 이석
스러진 대한제국 황실 종친 이석(72). 이석 황손은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의 아들이다. 그의 일생은 비운의 시대 구한말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궁에 살다 쫓겨나 식당을 열었고, 절집을 떠돌다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현재 기거 중인 전주 한옥마을에서 그를 만나 근황과 남은 포부를 들었다.
그는 1979년 10·26 사건 직후 칠궁(七宮)에서 쫓겨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사적 제149호인 칠궁은 조선 왕의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신군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청와대 인근인 이곳에 살고 있던 이석 황손을 헌병대를 동원해 내쫓았다. 조선왕실 재산환수나 품위유지 같은 것은 바랄 수도 없었다. 그 해 12월9일 그는 “다시는 이 나라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인생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어려워졌다. 조선왕실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정권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안천 서울교대 교수와 함께 황실문화재단을 만들어 20년째 조선왕실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마지막 꿈이 하나 있다면 우리나라가 옆 사람을 살피고 뒤(역사)를 돌아볼 줄 아는 그런 여유 있고 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얘기는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1990년 초반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허무하게 느껴더군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노래를 하려니 나이는 육십이 됐고. 그래서 ‘머리 깎고 중이 되자’하고 절을 돌아다녔어요.” 그는 1960년대 ‘비둘기 집’을 불러 크게 히트한 가수였다.
오대산 월정사 등 여러 절을 다녔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절에서 나온 그는 우연한 기회에 MBC 가요초대석 사회를 맡았다. 그러나 당시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되던 드라마에 ‘순조황제가 일본 천황을 죽인다’는 내용이 나왔고, 일본 정부에서 문제 삼으면서 방송 진행을 그만 두게 됐다고 한다. 이후 일식집을 차렸다가 1998년 IMF 사태 여파로 문을 닫고 다시 절에 들어가 2년을 살았다.
자살시도 여러 번 “눈물도 다 말라”
곤고한 생활이 이어지며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약을 먹고 도봉산 절벽에 매달린 적도 있다고 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경복궁 대문에 부닥치려고 했지요. 찜질방에서 유서를 썼죠. 그런데 그날 찜질방에서 옆에 자고 있던 사람이 어느 주간지 기자였어요.” 그 기자는 이석 황손을 알아보고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 찜질방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일간지·잡지·외신 할 것 없이 인터뷰 요청이 쇄도해 화제가 되곤 했다. 이를 계기로 전주와의 인연이 생겼다. 한 지인이 주선해 2003년 8월 전주의 한 식당에서 강연을 했다. “여태까지 살아 온 것 한 시간 정도 얘기하겠다”는 생각에서 응했다고 한다. 당시 김완주 전주시장(현 전북도지사)이 한옥 600채가 들어서는 대규모 한옥마을을 조성하기로 하고 그에게 150평짜리 한옥을 지어줬다. 고종황제의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승광재(承光齋)라 이름 짓고 2004년 10월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후 3년 간 울산·부산·대구 등지를 돌아다니며 대학생들에게 강의를 했다. “전주대학에선 1~2학년 학생 대상으로 강의했는데, (강의) 끝날 때 ‘비둘기 집’ 노래도 불러주고 하니까 소문이 나서 학생이 점점 많아졌죠.” 학생들에게 “내가 60년 전에 상궁들한테 도시락을 먹은 왕자”라고 하면 “만화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가수로 활약하다 군에 입대해 베트남에 갔다왔다. 1969년 비둘기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직후 영보시장에서 우동장사를 하던 그의 어머니가 별세했다. 그는 동생 네 명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그때는 “이제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의친왕은 1877년생으로 순종황제보다 세 살 많다. 62세에 이석을 낳았다. 의친왕은 1900년대 초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대학을 5년 간 다녔다고 한다. 고종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퇴위를 종용하자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고종은 6남1녀(순종, 영친왕, 완친왕, 육, 의친왕, 우, 덕혜옹주)를 뒀지만,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은 자식이 없어서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했다. 이 마지막 황태자는 11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한 뒤 형식적 왕위 계승자가 돼 이왕(李王)이라 칭하였다.
대한제국 황가 계보에서 그의 자리를 짚다 보니 우리 역사의 뒤안길이 지울 수 없는 애환으로 다가왔다.
가장 궁금한 것은 그가 결혼했는지
못했다면 왜 못했는지
왜 가정을 이루지 못했는지
이런 거다.
왕가의 사람이 후손이 없는지
있는지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