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바로알기] 브로커(Broker)와 대리인(Agent)

미국과 유럽에서 브로커는 수백 년 동안 어음, 보험, 선박, 세관 등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 대접을 받고 있다.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서 거래가 수월하게 이뤄지도록 돕기도 하고, 민간인과 정부 기관 사이에서 전문적인 서류들을 대신 준비하고 수속해서 양측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양 당사자가 직접 거래하고, 직접 수속하여도 되겠지만 거리와 시간적인 제한 때문에 또는 어느 한 쪽의 전문적인 지식부족 때문에 업무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고 때로는 쌍방의 업무에 혼선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관련 업무의 브로커를 통해서 신속하고 매끄럽게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로커의 적절한 도움은 쌍방에게 이익이 되며, 브로커의 커미션(수수료)은 계약 내용에 따라 어느 일방 또는 쌍방으로부터 정해진 금액을 받는다.

그런데,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브로커를 뚜쟁이 취급을 하면서 천시하는 경향이 있다. 뚜쟁이(중매인)는 옛날부터 미혼남녀 또는 재혼을 하고자 하는 남녀가 자유롭게 사귀지 못하던 시절에 양측을 맺어주던 사람들을 일컬었으나, 양측의 단점은 감추고 장점만 부각하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도 받아왔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브로커라 하면 자신의 목적(계약 성사 시 받게 되는 커미션)을 위해서 쌍방의 단점을 고의로 감추고, 쌍방의 장점만 얘기하는 사람들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근래에는 쌍방의 브로커가 아닌 어느 일방의 브로커가 활동하는 게 지배적이다. 그래서 커미션을 제공하는 측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단점과 영업비밀도 일부러 알아내려 한다.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브로커가 제공해주는 정보만으로 커미션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들을 브로커와 구분해서 에이전트(대리인, 대리점)라 부른다. 쌍방의 브로커이든 어느 일방의 에이전트이든, 브로커(또는 에이전트)를 필요로 하는 측에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의 내용과 영역 및 수수료(commission)를 서면으로 명시하여야 한다. 일이 마무리된 후 서로의 느낌(감정)에 의존한 정산을 하는 경우가 한국인들 중에 많이 있는데, 자칫 다툼을 야기할 수 있다. 매사에 서류로 조건을 명시하지 못하고 감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한국인들의 단점이다.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그러므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가 필요로 하는 조건들에 대해 합의하여 문서화해야 한다.

신의성실의 원칙을 저버렸다 할 때, 동양적 사고방식은 상대방을 믿고 있는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것인데 비해 서양적 사고방식은 계약조건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애매모호하고 변덕스러운 감정에 보다 치우쳐있고, 서양적 사고방식은 구체적인 문서와 증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양적 자본주의 사회인 필리핀에서 생활하는 이상, 브로커(한국 교민이든 필리핀인이든)와는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문서로 조건들을 명시하고, 일을 진행하는 동안에 상황이나 조건이 바뀌는 경우에도 추가로 문서화하여, 정산을 하게 되는 시점에는 감정보다 문서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가난해서 끼니도 못 먹고 다닌다고 오해해서인지, 도움을 준 브로커에게 몇 번의 식사와 술을 대접하고는 정산을 끝냈다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계약서 없이 일을 시작하는 브로커(대리인)와 사업가들은 아마추어들이거나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프로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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