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해운업 통해 본 ‘필리핀 사업가’ 특성
현재 한국경제를 이끌어가고 있는 5개의 핵심 분야들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해운이다. 이 중에서 4개 분야는 제조업이고 해운만이 서비스업이라 할 수 있다. 선박을 이용하여 상품을 운송해 주는 대가로 운임을 받는 업종인데, 한국에는 현대상선, 한진해운, SK해운, STX팬오션 등 유력한 재벌들이 큰 비중으로 해운업에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경우에는 최상류층 가문들은 해운업을 하지 않는다. 항만(컨테이너 터미널)을 운영하는 Razon 가문과 연안 여객선을 운항하는 Aboitiz 가문 정도가 해운업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선박을 소유 또는 임대하여 국제 간 화물을 운송하여 운임 수입을 올리는 국제 해상 운송업과는 거리가 있다.무역 관행에 있어서도 수입 화물들은 CNF 조건으로, 수출 화물들은 FOB 조건으로 거래해 버리기 때문에 외국 회사들이 화물 운송권을 가지고 운임 수입을 챙기게 되어 해운업으로서의 사업 기회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그 이유는 국제 해운업이 필리핀 상류층의 성격과 문화 및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선박이 외국의 항구들에 화물을 싣고 다니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그 외국은 자신의 영향권이 아니어서 필리핀 국내에서처럼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사(변호사, 집사)를 보내어 빨리 해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중·상류층들이 국내 여객선과 화물선은 운영하지만, 국제 여객선 운영은 전혀 없고, 국제 화물선도 극히 일부만이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어서 국제 해운업계에서 경쟁력이 없다.
둘째, 국제 해운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한국의 경우 상위 10% 이내에 해당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해운 계통의 대학에 진학하여 고급 인력으로 양성되고 있기에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 해운 회사들과 경쟁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데 비해, 필리핀은 중간 정도 또는 그 이하 수준의 서민층 자녀들만이 해운 계통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외국의 해운 회사들과 경쟁할만한 인재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해운과 관련하여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필리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도 아주 낮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우 각 항구에서 도선사(導船士 Pilot)라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십 수 년 간 해운 관련 전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거대한 선박들의 입항과 출항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한국 내에서 최고 연봉자들로 분류된 적이 있었으며, 각 항구 도시의 지역 사회에서 유지로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리핀의 경우에는 도선사의 수입이 중산층 수준밖에 되지 않을 뿐더러 지배층들이 도선사들을 지역의 유지(有志 bigwig)로서 인정해주지 않는다. 원래 도선사들 거의 대부분이 서민층 출신들이다. 도선사의 수입이 되는 공식 요율(pilotage)은 35년 전인 1977년 공시된 이후 한 번도 인상된 적이 없을 정도로 필리핀 해운업계 인사들의 위상이 낮고 영향력도 미미하다.
한국에는 평균 4만7천톤 규모의 대형선박들을 약 1200척 보유하고 있고 1000척 이상을 임대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비해, 필리핀은 평균 2만톤 규모의 중형 선박들을 겨우 200척 정도 보유하고 있고 임대하여 운영하는 선박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필리핀 해운업의 규모가 한국에 비하면 1/25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일부 교민들이 상호에 ‘해운(海運 shipping)’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으면 선박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선주회사로 착각하는데, 필리핀에서 운영되고 있는 대부분의 해운업계 회사들은 이삿짐과 택배 또는 화물을 가지고 선주회사와 운임을 흥정하는 포워딩(Freight Forwarding) 업체들이다. 이에 비해 선박 대리점들과 선원 송출 대리점들은 선주회사의 현지(필리핀) 대리인으로서 선주(船主 ship-owner)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