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필리핀 변호사 이야기
변호사들은 한국과 달리 대부분이 상류층이 아니라 중산층이다. 법과대학 졸업자들만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8개의 시험과목 중 어느 한 과목이라도 100점 만점에 50 이하면 불합격 처리된다. 전체 평균 100점 만점에 75점 이상이면 응시 인원에 상관없이 전원 합격이 되며 변호사 면허를 받는다. 필리핀에는 현재 생존해있는 변호사들이 약 4만명 정도라 한다. 한국의 경우 1만명 정도인 것에 비하면 거의 4배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필리핀에서는 변호사의 법률자문을 구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중산층과 상류층뿐이다. 한국도 중·상류층(전체 인구의 약 50%인 2500만명)만이 변호사의 서비스를 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필리핀의 중·상류층(1억 인구의 10%인 1000만명) 대비 변호사의 숫자를 비교해 보자.
한국 : 변호사 1만명이 2500만명 자문⇒변호사 1인당 2500명
필리핀 : 변호사 4만명이 1000만명 자문⇒변호사 1인당? 250명
이같은 수요의 비교로 본다면, 한국보다 필리핀의 변호사 수가 10배나 많다고 보거나 시장규모가 한국의 1/10밖에 안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필리핀의 변호사들은 한국의 변호사들에 비해 수입이 턱없이 적어, 한국의 변호사들이 상류층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데 비해 필리핀 변호사들은 거의 대부분 중산층 생활을 하고 있다. 필리핀의 관공서에는 법률 담당 부서가 있어서 그곳에 여러 명의 변호사들이 고용되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급여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대부분 사적으로 변호사업을 병행한다.
중견기업들과 대기업들은 여러 명의 변호사들을 회사 내의 법률 부서에서 월 급여 10만페소(260만 원)정도로 고용하고 있다. 작은 기업들은 로펌과 계약(retainer agreement)하여 법률 서비스를 받곤 한다. 예를 들면, 횟수에 상관없이 전화 상담과 로펌에 찾아가서 하는 법률 상담, 법적인 문서작성 등의 서비스를 받는 대가로(재판건과 출장건은 별도) 매월 5000~1만페소(13만원~26만원)정도 지불한다. 많은 교민 사업가들도 각자의 사업 분야에 맞는 전문 로펌과 저렴한 가격으로 계약하여 평소에 필리핀 업체들과 거래할 때 법적으로 치밀한 서류 작성을 하고 있다.
일부 한국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한국의 변호사처럼 수천만원짜리 고액의 수임료나 상담료가 필요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변호사들도 있을 터이지만 극히 일부일 뿐이고, 대부분의 필리핀 변호사들은 수십만원 또는 500만원 이하의 수임료를 제시한다. 둘째, 고액 변호사가 우수한 변호사일 것이라는 편견과 어느 변호사든지 모든 분야의 법적자문을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변호사마다 저마다의 전문 분야가 있고, 어느 한 분야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변호사가 따로 있다. 원하는 분야의 전문 변호사를 쉽게 찾는 방법은, 예를 들어 직원들과의 노사문제로 노동법 전문 변호사가 필요한 경우에는 노동청에 가서 쟁의 담당위원(변호사)으로부터 추천을 받으면 된다. 자기들과 서로 반대편에서 다투기도 하지만 서로의 의뢰인을 대신해서 흥정도 해주기 때문에 노동법 전문 변호사들 중에 누가 우수하고 누가 저렴한지 알려줄 것이다. 민사나 형사사건인 경우에도, 담당 검사나 판사를 찾아가 변호사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몇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고, 그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변호사와 계약하면 된다.
신규 사업을 추진할 때 변호사를 주주 중 한 명으로 참여시키기를 원하는 한국인들이 간혹 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니 안심이 될 것이고, 사업 파트너이니 따로 변호사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 것 같다. 모든 사업에는 주도권(경영권)을 가진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가 있게 마련이다. 그 변호사 주주에게 언젠가는 주도권(경영권)을 줄 생각이 아니라면 주주 명단에서 배제하고 필요할 때마다 별도로 법률 자문을 받고 정당한 자문료를 지불하는 것이 필리핀에서의 상식이다. 변호사는 법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유리한 사항과 불리한 사항을 적절히 감추며 주도권(경영권)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순간이 오기를 기다릴지 모른다.
필리핀 변호사들 간에 널리 통하는 농담이 있다. “모든 변호사들은 거짓말쟁이다. 그러나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변호사는 아니다.”(All lawyers are liar. But not all liars are lawyer. by Atty. Pedro Ganancial) 필리핀 지배층들은 변호사를 법률 보좌진 또는 집사 수준으로 대우할 뿐, 사업 파트너로 대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필자는 지난 22년 동안 필리핀에서 생활하면서 내 신변이나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 단 한 번도 대사관이나 어느 한인들의 모임(단체)에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없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적도 없었거니와 모든 문제들을 변호사와 상의하여 무난하게 해결해왔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민들이 필자처럼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부터 법률 자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혹여나 아직 고문 변호사를 두고 있지 않은 채로 사업 또는 장사를 하고 있거나 영어 연수를 위해 와 있어서 변호사 고용에 대한 사정을 잘 모르고 있는 교민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제안해 드리고 싶다.
첫째, 같은 지역에 있는 몇 개의 한국업체들 또는 여러 사람의 학부모들이 협의체나 모임을 만든다. 10여개 정도의 업체나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된다. 둘째, 매달 1천페소(2만7천원) 정도씩 회비를 걷는다. 셋째, 같은 지역에서 사무실을 내고 있는 또는 거주하고 있는 변호사를 찾아 계약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문제에 부딪히는 이민국 관련 전문 변호사와 계약하고 싶다면, 이민국에 찾아가 변호사 면허를 가지고 일하고 있는 공무원에게서 추천을 받으면 된다. 매달 1만페소(27만원) 정도 지불하면 소송으로 가기 전까지의 방문 상담이나 전화상담 등을 언제든지(하루 24시간, 매일) 받을 수 있다. 변호사의 휴대폰 번호를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소지하고 있다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수시로 연락해서 자문을 받으면 된다.
필자의 경우, 교통경찰과 신호위반이나 차선위반 같은 사소한 시비가 붙었을 때에도 고문변호사에게 전화하여 교통경찰과 직접 얘기하도록 하여 푼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민국 수사관이 조사하러 온다면 고문변호사와 직접 통화하게 하여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할 수도 있다.) 넷째, 만일 계약한 변호사가 불성실 하거나 너무 바빠 제때 상담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변호사를 찾아서 계약하면 된다. 몇 번 바꾸다 보면 서로의 필요와 사정에 맞는, 친절한 변호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필리핀에서 가정부와 운전수가 매우 유용하듯이 변호사도 잘 활용하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을뿐더러, 현지인들의 협박에 괜히 지레 겁먹어 거액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고, 개인들 또는 사업상 다툼을 해결해 달라고 한국 대사관을 찾아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막대한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사관에 자잘한 사건들의 해결사 역할을 맡길 게 아니라 전시나 소요 사태 등이 일어났을 때 교민을 보호한다거나, 국익을 위한 좀 더 큰 건들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필리핀 서민들은 변호사들이 그다지 비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이 너무 적어 변호사들의 법률 서비스를 받을 여유와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국선 변호인(Public Attorneys)을 찾아가거나, 승소했을 때의 이득을 변호사와 일정한 비율로 배분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국선 변호사는 전국에 약 1000여명이 정부에 고용되어 연간 약 80만건의 소송사건에서 서민들을 변호한다고 한다. 국선변호사 1인당 800건, 또는 매월 67건, 또는 매주 17건의 사건을 변호한다는 것인데, 업무량이 너무 많아 실제로 서민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