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⑥ 중국 소수민족 정책 단호한 이유
새방파 “신장지역 불안정은 베이징 안위와 직결”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엔 빛과 그늘이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지나치게 거대강국이 된 중국 내 소수민족의 향배에 민감하다. 옛 소련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중국공산당의 버티기 작전이 끝내 승리할 것인가, 두 가지 전망이 공존한다. 역사는 흘러가고 여울을 지으며 결국은 어떤 도착점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그 결론마저 변화하는 것이 역사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답이 보일까?
1920년대 황푸(黃?)군관학교는 중국 근대혁명의 요람이었다. 장제스(蔣介石) 교장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정치부 주임. 둘은 아침마다 함께 식사를 하며 머리를 맞댔으나 지향하는 바는 달랐다. 장제스는 자신이 쓴 <증국번(曾國藩)과 좌종당(左宗堂)의 군사관리 어록>을 교재로 삼았다. 저우언라이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지난날의 황푸군교는 정치공작이 전혀 없는 허울만의 학교였다. 장제스 교장실 앞에 걸린 나무족자에는 ‘높이 올라 바다를 바라보고 말에 올라 중원을 평정하네’라는 위유런(于右任)의 글씨가 쓰여 있을 뿐, 학생들 손에 쥐어준 책이라곤 <증국번과 좌종당의 군사관리 어록> 정도였다. 이런 책 따위로 어떻게 학생들을 진정한 혁명군으로 키울 수 있겠는가?”
저우언라이는 젊은 친구들을 황푸군교에 끌어들이면서 이 같이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레닌이 창시한 붉은 군대의 경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 말기 새방파(塞防派)와 해방파(海防派)가 첨예하게 맞섰다. 바다를 건너오는 영불(英佛) 등 서구열강 세력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것이 해방파의 주장이고, 새방파는 중국 대륙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 야욕이 더 큰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새방파의 맨 앞에 좌종당(1812~1885)이 있었다. 그는 1875년 4월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신장(新彊)을 버릴 것을 주장하자 이홍장을 매국으로 몰아붙이며 이렇게 일갈했다.
“서구 해양국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일 뿐 결코 중국의 영토와 인민에 있지 않다. 신장이 중요한 것은 몽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몽골을 유지하려는 것은 경기(京畿,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유지를 위한 것이다.”
좌종당의 주적은 러시아였고, 으뜸가는 경계대상은 제정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이었다. 러시아의 침략 야욕을 막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지역이 몽골과 신장이라고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주적’ 논란…서구열강이냐, 러시아냐
신장 지역을 둘러싼 한족(漢族)과 위구르인의 패권 다툼은 1949년 신장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자치구로 결판나기까지 그야말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나름의 제국을 세웠던 위구르인들은 18세기 청나라 강희제에게 정복당했다. 100년에 걸친 청나라의 무슬림 지배는 1865년 한번 막을 내린다. 태평천국의 난 틈새를 노린 무슬림 무장세력이 청군을 물리치고 이슬람 정권을 세운 것이다.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과 국교를 맺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였다.
이 무슬림 정권을 타도한 것이 좌종당이 지휘하는 청의 원정군이었다. 신장은 다시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되었고, 청나라나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이나 마오쩌둥의 공산정권이나 한결같이 신장을 중시했다. 새방파의 배후는 임칙서(林則徐1785~1850)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편전쟁으로 영국군과 전쟁을 치렀던 임칙서가 해방파의 대표가 아닌 새방파의 원조라니,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역사의 감추어진 뒤안길이 있다.
임칙서는 아편전쟁의 책임을 지고 한때 신장으로 귀양을 갔었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를 본 것이다.
“영불 등은 대단한 것이 못된다. 중국에 최종적으로 우환이 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일 것이다. 나는 늙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들은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임칙서가 영불 등의 침략을 걱정하는 후배 관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신장의 일리(伊犁)지역이 러시아와 접경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3년 동안 러시아를 살핀 뒤 <아라사국기요(俄羅斯國紀要)>라는 책을 펴냈다.
소수민족 분리, 옛 소련 전철 밟나
1956년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부를 이끌던 장제스가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중국 속의 소련(蘇俄在中國)>. 장제스는 이 책에서 1923년 8월 ‘손일선 박사 대표단’을 이끌고 한 차례 소련을 다녀왔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쑨원은 자신이 총통으로 있는 광둥 정부의 대본영 참모장으로 장제스를 임명하고 그에게 소련 방문을 지시했던 것이다. 장제스는 쑨원의 기대와는 달리 소련은 결코 중국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소련과 코민테른의 모든 짓거리는 중국을 공산화하려는 술책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쑨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산 중국과 공산 소련의 관계 역시 착잡하고 변화무쌍하다. 밀착과 길항, 긴장과 협력의 연속이었다. 오늘의 중국은 러시아를 추월해도 한참 추월했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러시아와의 동맹을 다시금 다지면서 오히려 해양진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임칙서의 걱정근심을 용케 이겨낸 셈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지난날 새방파의 우려와 경계심을 완전 극복한 것일까?
세상엔 완전이란 것이 없다. 티베트 승려들은 분신으로 항거하고, 신장 위구르인들의 폭력적 저항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 신장 등 소수민족 정책에 있어 아주 단호하다. 지난 10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지프차 한 대가 돌다리를 들이받아 폭발한 사건도 위구르인 일가족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럴수록 중국은 더더욱 신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놓칠 수가 없다. 몽골, 신장 지역의 불안정은 베이징의 안위와 직결된다는 옛 새방파의 주장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