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 ②중국, 한 단계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덩샤오핑

일당체제-개방경제 ‘덩샤오핑 이원론’에 머물러

덩샤오핑의 이원론(二元論). 이를 협공하는 좌우(左右) 강경파들. 무슨 철학논쟁이 아니다. 아니, 철학논쟁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흔히 알려진 중국공산당의 권력투쟁은 늘 이런 이론투쟁과 안팎을 이뤄왔다.

이원론의 주된 골자는 경제개혁에서 부르주아 자유화를 추진하면서 정치에선 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 정치는 공산당 일당체제를 유지하되, 경제는 개방을 지향해시장경제를 과감하게 도입한다. 이런 중국공산당의 이원론적 입장에 대한 좌우의 협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극좌(極左)는 이미 꼬리를 내리다시피 했지만 요즘은 정치자유화를 부르짖는 우파의 공세가 거세다. 공산당의 가장 큰 골치거리다. 전 충칭(重慶) 당 서기보시라이(薄熙來)의 정치적 야망과 실험이 막을 내리면서 좌파의 기세는 한풀 꺾인 모양새가 되었지만 보시라이의 ‘타흑창홍(打黑唱紅)’의 여진(餘震)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부패척결(타흑)과 마오쩌둥 찬양(창홍)을 결부시킨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마오쩌둥 시대엔 나라 덩치는 컸지만 인민은 배가 고팠다. 고르게 배고팠다. 평준화된 가난이었다. 고달픈 삶을 인민들은 함께, 고르게 나누었다. 배고프다는 원성은 있었지만 오늘의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같은 불평등에 의한 ‘배아픔’은 없었다.

보시라이 좌파는 바로 그 점, ‘배 아픔’을 노렸다. 소외계층의 ‘배 아픔’ 현상을 부패척결과 결부시켰다.그는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충칭을 실험무대로 삼아 중국공산당 최고위부 진입을 노렸고 그 이후까지도 노림수의 대상으로 삼았다.

박 대통령에게 ‘등관작루’ 족자 선물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73년, 덩샤오핑이 복권된 직후 어느 날, 저우언라이가 한 뭉치의 서류를 덩에게 보여주었다. 복권을 앞둔 당 간부들의 명단이었다. 단번에 이렇게 많은 노 간부들이 풀려나는 것을 마오쩌둥이 허락할까 걱정하는 덩샤오핑에게저우언라이가 말했다.“이 일은 주석이 내게 맡긴 일이요. 전국 현, 시 급 이상 간부 가운데 현재 심사를 받고 있는 사람이 3700명, 이 가운데 368명은 중앙기관과 국무원 간부, 위원회 국장 급 이상이요. 몇 십 년 동안 혁명사업을 해온 노 동지들이 7~8년씩 감옥에서 썩고 있었소. 가슴아픈 일이요. 샤오핑 동지. 당신 보기에 이 명단에 꼭 들어가야 하는데 빠진 사람 있으면 말해보오”

덩샤오핑은 만년필을 꺼내 문서 뒷면에 네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완리(萬里) 후챠오무(胡喬木) 후야오팡(胡耀邦) 자오즈양(趙紫陽)’

후야오팡과자오즈양은 대표적인 개혁파로 역사에 기록된다. 공산당 이론가인 후챠오무는 두 사람과 첨예하게 맞서 이들의 실각에 일역을 했다. 후챠오무만이 아니고 많은 당 원로들이 두 개혁파의 실각에 앞장섰다. 대표적 인물은 천윈(陳雲), 경제통인 그는 먼저 사회주의 경제의 골자인 계획경제의 붕괴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도 강경파였다. 자오즈양 실각엔 리펑(李鵬)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자오즈양을 실각시키면서 제3의 인물이라 할 장쩌민(江澤民) 상하이 시 당 서기를 당 총서기에 앉혔다. 리펑은 국무원 총리로 균형을 잡았다.

후야오팡,자오즈양 두 사람 다 덩샤오핑의 절대적 지지로 개혁에 앞장섰다.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을 한꺼번에 이루고자 했다. 엄청난 반발이, 폭풍이 몰아쳤다. 덩샤오핑은 두 사람의 강력한 후견인이었지만 결국은 좌우협공 속에서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야오팡이 결정적으로 실각하게 된 배경은 세대교체 주장이었다. 표적은 덩샤오핑. 함께 물러나자고 했다. 덩샤오핑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당 원로들이 후야오팡에 적대적 입장을 취할 때 그를 감싸고 돈 사람은 시중쉰(習仲勛)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덩샤오핑이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였다면 시중쉰은 아이디어맨으로 일등 공로자였다. 그런 두 사람도 후야오팡을 둘러싼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중쉰은 부총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시중쉰, 오늘의 중국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의 아버지이다. 1953년 시진핑이 태어날 때만 해도 시중쉰은 당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1962년 모함으로 당 선전부장에서 쫓겨났다. 이어 문화혁명 10년, 통털어 그의 고초는 장장 18년이었다. 덩샤오핑의 복권, 등장과 때맞춰시중쉰도광둥(廣東)성 당 서기, 국무원 부총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후야오팡 집안과 시중쉰 집안은 좋은 관계를 이어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해마다 설날이면 시진핑은후야오팡 미망인을 찾아뵙고 문안을 드렸다. 시진핑 앞의 국가주석 후진타오 역시 해마다 후야오팡 가족을 찾았다. 후야오팡은 중국 공청단(共靑團)의 대부이다.

후진타오는덩샤오핑에 의해 점지되어 정상에 올랐지만 그의 정치적 배경과 기반은 공청단이다. 공청단은후진타오의 정치적 고향이다. 후진타오와시진핑은후야오팡 말고도 칭화(淸華)대학 동창으로도 연결된다. 시진핑에 이어 1인자에 버금가는 2인자가 된 총리 리커창(李克强)은 공청단 인맥이다.

시진핑은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당(唐) 시인 왕지환(王之煥)의 ‘등관작루(登觀雀樓)’란 시가 적힌 ?족자를 선물했다. <사진=청와대>

시진핑, 똥장군 지는 노역 경험

시진핑은 신중하고 관후한 인품으로 알려져 있다. 리커창은 활달하고 논리적이다. 시진핑은 체질적으론 아버지 시중쉰의 DNA로부터 일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시진핑을 시장(市場)친화적, 실용적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에 강하다고 보는 것도 다분히 아버지 시중쉰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닐까. 시진핑은 이제 막 10년 집권의 출발점에 서있다.

시진핑은 청소년시절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문화혁명 때까지도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 간부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의 학교에 다녔다. 1966년부터 10년 가까이 시진핑은 서북의 오지에서 똥장군을 지며 제방쌓기 등 힘든 노역을 감수해야 했다. 시진핑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냉온탕을왔다갔다 한 그의 값진 인생역정 때문 아닐까 싶다.

후야오팡의 개혁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보이보의 아들 보시라이는 ‘창홍’의 깃발을 거창하게 내걸었지만 아내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시중쉰의 아들 시진핑은국가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 이 시점의 그는 시중쉰이 밀었던후야오팡, 자오즈양의 개혁이념을 이어받은 우파세력의 파상공세 앞에 최후의 방어자가 돼있다.

역사는 늘 이런 아이러니를 즐기는 것 같다.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이원론에서 아직은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중국이 한 단계 높이 올라갈 수 있을까. ‘아직’일지, ‘언젠가’일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시진핑은 중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족자를하나 선물했다. 당(唐) 시인 왕지환(王之煥)의 ‘등관작루(登觀雀樓)’란 시가 적혀있었다.“천리 너머 멀리 바라보려고, 누각 한 층 더 올리네(欲窮千里目更上一層樓)”. 한·중관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의 눈높이가 올라갈 때마다 세계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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