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 ④한·중 역사 새 장 열 ‘최치원 코드’
멀어진 중화문명 다시 돌아볼 때
중국 땅은 나라 잃은 한국인들에게 안성맞춤의 망명지(亡命地)였다. 강 하나, 바다 하나 건너면 바로 만주요 중원이었다. 1921년 1월1일 상하이 임시정부 신년하례회에 40대 중반의 신사가 나타났다. 미국 하와이에서 밀항해온 이승만 박사였다. 대통령 자격이었다. 이날의 기념사진엔 안창호, 김구, 여운형, 조소앙, 신익희 등 낯익은 얼굴들이 보인다.
이승만과 비서 임병직은 1920년 11월16일 여권도 비자도 없이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직행하는 화물선에 올라탔다. 밀항이었다. 물론 선장의 비밀스런 도움이 있었다. 관(棺)이 실린 배 밑창에서 변장한 채로 스무 날 가까이 풍랑에 시달렸다. 12월5일 상하이 부두에 내린 두 사람은 5월9일 상하이를 떠난다. 그 사이 사나흘 말미를 내 상하이 변두리 쟈딩(嘉定)구로 역사탐방을 나선다.
이승만은 한국인 제1호 미국 박사이다. 그는 서양문물을 누구보다도 일찍 받아들인 개화파 선진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인문학적 뿌리는 중화문명, 즉 유교문화였다. 그는 조선조 이씨 왕가의 후손이었고, 젊은 시절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 그는 한시 쓰기를 즐겼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가끔씩 한시를 읊었다. 상하이로 가는 망망대해 배 안에서 다음 시를 남겼다.
一身漂漂水天門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한 몸
萬里大洋畿往還 만리 길 태평양 오가기 그 몇 번이던가
到處尋常形勝地 이름 있는 명승지 어디 한 두 군데랴만
夢魂長在漢南山 꿈 속에서도 내 고향 오로지 남산뿐일세
그가 찾았던 쟈딩구는 오늘날 상하이에서도 손꼽히는 신흥 경제개발구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알아주는 역사문화지역이었다.
2005년 문을 연 ‘중국과거(科擧)박물관(The Shanghai China Imperial Examination System Museum)’이 쟈딩구에 있다. 2006년 봄부터 1년 동안 나는 상하이 쟈딩구에서 살았다. 내가 명예원장으로 있던 상하이 사범대학 톈화(天華)학원 캠퍼스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가 캠퍼스 안에 정해지던 날, 과거박물관부터 찾았다. ‘최치원(崔致遠)’ 이름 석 자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역대 합격자들 명단에서 ‘최치원’을 찾았을 때, 당연히 있어야 할 이름이지만 너무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은 당나라 유학생, 과거 합격, 당의 관리로 승승장구, 문명(文名)을 떨치다가 당의 사신으로 귀국했다. 그는 신라에 중화문명의 꽃을 피운 선각자였다.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과거제도는 명·청대에 융성했다. 중국은 이 제도가 1300년 동안 ‘공개고시 평등경쟁’의 원칙을 지켜왔다고 자랑한다. ‘과거’의 바탕은 ‘유학’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공자사상과 학문이 과거의 골간이다.
과거박물관에 또렷한 ‘최치원’ 이름 석자
고래로 중국은 한국을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었다. 중국을 둘러싼 네 오랑캐, 즉 동이, 서융, 남만, 북적 가운데 문화적으로 동이를 으뜸으로 쳤다. 우리 또한 ‘소중화’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도 과거제도가 융성했고, 조선왕조가 몰락할 때까지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천자문을 익혔고, 시경과 공맹(孔孟)을 열심히 학습했다. 중원과 한반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문화·정치·경제 모든 분야에서 의존, 예속, 밀착, 유착, 그리고 화평의 관계를 유지했다.
청나라 말기 최고 지성인이었던 링치차오(梁啓超)는 ‘조선애사(朝鮮哀史) 5율 24수(五律二十四首)’란 시를 써 한국의 일본 예속을 애통해 했다. 그는 한국이 망하는 것을 망명지 일본에서 지켜보았다. 한국인이 쓴 애사(哀史), 통사(痛史)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링치차오의 애사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시 구절 몇 줄만 읽으면 대뜸 심사가 뒤틀린다.
奇福無端至 기이한 복이 까닭 없이 굴러온 듯
無胎受命符 아직은 수명부도 받지 않았는데
夜郞能自代 야랑이 스스로 잘난 척 뽐내듯이
帝號若爲娛 제국 국호 만들어 웃음짓네
정상회담서 ‘범해(泛海)’ 시구 인용
링치차오는 한반도에서 수천 년 면면히 이어져온 중화문명이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역사의 굉음을 들었다. 그는 고종 임금의 ‘황제 선언’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 중국 황제로부터 ‘수명부’를 받지도 않은 처지에서 제멋대로 감히 ‘제국’을 선포하다니. 그는 옛날 서역의 한 작은 나라 ‘야랑’의 임금이 자기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고 뽐냈다는 고사를 들먹인 것이다.
그가 진실로 애통해 하고 충격 받았던 것은 조선왕조의 멸망 자체가 아니었다. 한반도에서의 중화문명의 몰락, 동아시아의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는이란 책도 썼다. 조선이 망한 것은 중국에 대한 오랜 충성을 마다하고 신흥 일본에 빌붙은 결과라고 했다. 조선이 중국을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에 먹혀버리고 말았다고 했다.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얄궂게도 청나라 역시 자업자득이었다. 청일전쟁 패전은 청의 몰락을 재촉했고, 중국인들에게, 중국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촉구했다.
요즘 우리 어린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영어를 배운다. 영미문화권에 익숙해 있다. 우리의 학문, 학술의 바탕은 영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역사상 유례없는 한국의 발전은 바로 태평양문화권과 직결되어 있다. 문화·경제·군사면에서 엄청난 유착이자 협력관계이다. 천자문이 유아교육의 전부이던 시대를 마감한 지 100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중화문명과 낯설어진 것이 그만큼 오래 됐다. 그 복원이 가능할까. 복원할 이유가 있을까. 완전 복원은 아니더라도 중화문명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G2로 성큼 올라선 중국의 위상과 세계전략이 예사롭지 않다.
적지 않은 한국 지식인들이 중국의 고사성어를 즐긴다. 전공과 관계없이 중국 시부(詩賦)에 정통한 분들이 많다. 특히 반가운 현상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부하신 분들 가운데 중국 고전에 밝으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중국 고전에 익숙해 있지는 않았을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친해지면서 ‘최치원’을 들먹이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 한·중 정상회담 때 시진핑이 그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중화문명을 고리로 한국과 중국이 역사의 새 장을 여는 데 있어서 최치원은 핵심 코드이다. 한국의 어린이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국의 어린이들이 영어교육에 열중하는 현실도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인적이 없다.
김구주석이 정부구성할때 이승만에게 외무장관을 임명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지 멋대로 대통령 명함파고 미국에서 대통령인척 행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