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 ③한중수교 막후 핵심 ‘류야저우’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23일 청와대를 예방한 리샤오린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을 접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현역장군 겸 작가?류야저우(劉亞洲), ‘문화혁명’ 비사 파헤쳐

류야저우(劉亞洲). 한국에서 유명한 이름은 아니다. 알 만한 사람은 중국의 작가이자 장군인 그를 익히 알고 있지만, 대체로 낯설다. 그 이름이 최근 그의 부인으로 말미암아 각광을 받았다. 류야저우의 현직은 중국 국방대학교 정치위원, 현역 공군 상장(上將; 한국의 중장)이다.

시진핑 집권 초입, 군 개혁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같은 태자당(太子黨)으로 시진핑 지지자로 분류됐다. 이런 경력만 볼 때, 류야저우는 한국과는 전혀 무관한 관계 같다. 하지만 그는 1989년 5월 덩샤오핑의 지시로 만들어진 ‘남조선영도소조(南朝鮮領導小組)’의 핵심 멤버였다. 한중(韓中) 수교가 1992년 이뤄진 걸 볼 때 이 팀의 역할과 위상을 알 수 있다.

소조의 조장(組長)은 부총리 겸 정치국 위원인 톈지윈(田紀雲). 예젠잉(葉劍英)의 아들 웨펑(岳楓; 본명 葉選寧)도 같은 멤버였다. 예젠잉이 누구인가. 중국 10대 원수(元帥) 중 한 사람, ‘사인방(四人幇)’ 타도의 원훈(元勳)이다. 웨펑은 당시 중국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 부장에 중국국제우호연락회 상무 부회장, 류야저우 역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대령, 둘 다 현역군인 신분이었다.

덩샤오핑 시대, 국가주석(1983-1988)을 지낸 리셴녠(李先念)의 딸 리샤오린(李小林)이 한국을 다녀갔다. 지난 7월 하순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회장인 리샤오린이 한국 외교부 초청으로 방한, 박근혜 대통령을 예방하면서 그의 남편 류야저우의 이름도 신문에 오르내렸다. 그들은 우한(武漢)대학 영문과 동창이다.

리샤오린은 1975년 인민대외우호협회의 번역 담당 직원으로 들어가 36년만인 2011년 회장이 되었다. 류야저우는 일찍부터 소설 등으로 문명(文名)을 날리면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88년 중국작가협회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서 열렸던 국제작가회의에 참석했다. 이듬해 그는 남조선영도소조에 발탁된다.

그의 작품 <톈안먼(天安門)>을 두고 작가는 논픽션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소설로 분류한다.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허문 작품이다. 그는 작가이면서 군부 고위직에 있다. 그의 위상으로 볼 때 예민한 기밀문서, 중요한 사료(史料)와 문건에도 손길이 닿을 수 있다. 그는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소설적 기법으로 이 논픽션을 써내려 간 것이다.

마오쩌둥의 권력승계와 문화혁명, 그 뒤안길을 류야저우는 간결하게 파헤쳤다. 한 대목을 읽어본다.

1965년 여름, 프랑스 대통령 드골이 작가 앙드레 말로를 중국에 특사로 파견했을 때였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말로의 대화에서 역시 후계자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드골이나 나 같은 사람에겐 후계자가 없지”

회견 당시 그 자리에 없었던 탓으로 비서실에 넘어온 대담기록을 검토하던 나는 그 말을 접하는 순간 이내 전투 나팔이 울렸음을 깨달았다. 마오쩌둥은 류사오치(劉少奇)가 그의 후계자라고 선언했을 때만큼이나 명확하게 후계자가 없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울린 문화혁명의 포성은 류사오치를 향했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를 조준 렌즈에 꼭 가둬 두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총알이 그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류사오치를 향했고,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는 포탄처럼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 일격에 그를 쓰러뜨렸다.

<톈안먼>은 넌픽션 형식의 픽션으로 꼭지 별로 여러 ‘화자(話者)’가 등장한다. 위 인용문에서 ‘나’는 결국 시대를 초월한 류야저우 자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008년 12월 류샤오치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에서 류샤오치의 가족대표 류둬리가 류샤오치 초상화를 배경으로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신화사>

마오쩌둥은 1961년 영국 몽고메리 장군을 만나 후계자로 두 사람 이름을 입에 올렸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빌미로 류사오치와 내키지 않는 ‘권력 분점’을 하고 있었다. 문화혁명이 나자 애초 공격의 표적도 이 둘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둘을 갈라놓았다. 국가주석 류사오치는 ‘적대적(敵對的) 모순관계’, 다시는 상종할 대상이 아닌 반면 덩샤오핑에겐 ‘인민내부의 모순’으로, 다시 살아날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두고도 류야저우는 다음과 같은 비장한 명문(名文)을 선보인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감정의 분출구를 찾고 있었다. 저우언라이의 죽음은 너무나 때맞춰 일어났고, 그는 죽음으로써 인민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었다…

어느새 날이 환히 밝아왔다. 광장에는 수 만 명의 인파가 붐비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은 조상의 산소를 찾아 명복을 비는 청명절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에게는 무덤이 없었다. 여기가 바로 그의 무덤이었다. 얼마나 웅장한 무덤인가! 모두들 인산인해(人山人海)라고 했다… 그야말로 천천히 흐르다가는 뭉치고 뭉치다가는 흩어지는 구름 그 자체였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해 물밑작업을 해왔다. 1989년의 ‘소조’ 이전에도 1983년 여러 방면에 걸쳐 한국어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에서도 냉온탕을 오가는 우리와는 별세계의 이야기이다. 현역 군인이며 작가인 류야저우가 한중 관계 진전에 한몫을 해왔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시진핑 주석의 영부인 펑리위안도 현역 장군이다. 인민해방군예술학원 총장이다. 그 위상이 말하듯 그는 나라와 당, 군의 가수로서 그동안 공적인 무대에서 활약했다. 100년 가까운 풍운의 역사를 지닌 중공당이다. 중공당, 그들의 실체와 비전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한중 외교는 맨날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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