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⑨ 인재양성의 문 열어젖히다
덩샤오핑, 대학입시 부활 결단…당정 중추세력 키워
조금은 구닥다리 얘기가 되겠지만, 지난해 3월25일자 ‘블로그(博客) 위클리’에 실렸던 한 기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1977년 겨울, 그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아직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대학 문이 열렸다. 마침내 대학의 커다란 문이 이들 학생들을 맞아들였다. 역사는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엮어가게 됐다.
36년 뒤, 그들은 국가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됐다. 리커창(李克强)이 총리직을 맡은 뒤 그가 제청해 임명된 정부 구성원 중 리커창 자신을 포함한 11명이 대학입학시험이 부활된 직후인 1977~79년 사이 대학에 입학한 ‘신삼계’들이다.
그들은 살아온 시대적 배경을 공유한다. 또한 비슷한 신분으로 여러 갈래의 사회 흐름을 함께 겪었다. 이제 그들은 중국정부 중견이 되었고, 시대는 그들에게 동일한 색깔의 밑바탕을 부여했다. 이러한 현상이 중국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것인가는 이제부터 인증될 것이다.
개혁개방과 대입 부활은 동전의 양면
1977년까지 대학입학시험은 11년 간 폐지됐었다. 대학 입시제도 회복을 기대하면서 심리적으로 많은 시달림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끝내는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 희망은 한 인간이 가져다 준 것이었다.
영화 <1977년도 대학입학시험>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무료한 한 여름 밤, 동북(東北)의 한 농장, 도시에서 내려온(下放) 지식청년들이 운동장에 모여 기록영화 하나를 보고 있었다. 화면엔 이들 청년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베이징에서 열렸던 축구경기가 상영되고 있었다.
짧은 팔, 흰 색 셔츠를 입고 축구장 주석대(主席臺)에서 뭇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짓하는 한 노인의 모습이 비춰지자 서늘하던 동북 농촌의 공기는 삽시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군록색 솜저고리를 입은 한 사나이가 흥분하여 손전등을 흔들면서 “덩샤오핑이야! 덩샤오핑이야!”하고 외쳤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대학입시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나라가 커가면서 사람도 자랐고, 인재가 성장하면서 국가가 발전해 왔다. 이른바 ‘신삼계’는 개혁개방의 최대 수혜(受惠)세력인 동시에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인 추진세력이었다. 인재는 중국 최고지도부에 입성했고 국가는 G-2로 자리매김 했다.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생애 세 번째로 극적인 복권에 성공했다. 그는 7월30일 베이징 축구경기장에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복권을 공식화했다. 다시 옛날 그 자리 국무원 부총리로 돌아온 것이다.
축구경기장에 나오기 전날, 그는 교육부장 류시야오(劉西堯)를 불러 물었다. “고중(高中) 졸업생들이 2년간 노동을 거쳐야만 대학에 들어가는 현행제도를 폐지할 순 없겠는가?”
며칠 뒤 교육 및 과학 공작회의가 덩샤오핑 주재로 열렸다. 회의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비판 성향의 교육자들을 불러 모았지만 처음엔 모두 시큰둥했다. 하나 마나 한 회의가 아니겠나 싶었던 것이다. 덩샤오핑이 바쁜 와중에도 자리를 차고 앉아 열성을 보이자 진정성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칭화(淸華)대학의 한 교수가 대학생 질(質)에 대해 우려의 말을 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어디 칭화대학이요? 칭화중학이지!” 그리고 말을 이었다. “대학은 혁명분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오.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지!”
우한(武漢)대학의 한 교수가 ‘공농병 학생(工農兵學員)’ 제도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현재의 공농병 대학생 모집방침은 ‘영도가 비준’하는 제도인데, 뒷문 거래가 성행하여 많은 군중, 특히 교사들의 반발이 심하다”고 이실직고 했다.
정부핵심 동시대 경험 공유
덩샤오핑이 교육부장에게 물었다. “올해 바로 대학입학시험을 회복하려면 시간상 문제가 없겠는가?” 류시야오가 이미 늦었다고 대답하자 덩샤오핑이 말을 받았다. “옳은 판단을 내렸다면 질질 끌 필요 없지 않소? 올해 바로 시험을 치르도록 합시다.”
덩샤오핑은 단 5분 안에 결론을 내버렸다. ‘대학입시 회복(恢復高考)’이 이뤄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덩샤오핑은 내년 6월까지 기다릴 수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했다. 올해 당장 시험을 치르자고 결단과 명령을 동시에 내렸다.
12월에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시험지가 없었다. 찾아보니 <모택동 선집>을 찍기로 했던 좋은 종이가 많이 남아 있었다. 대학입시 부활은 이처럼 벼락치기로 진행됐다. 장관급인 중국의 최고위 당직자, 공직자들이 한 시대 공통의 경험과 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주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체험들이었다.
시진핑만 해도 자기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을 매도하는 집회에 동원돼 또래 친구들과 더불어 “시중쉰 타도”를 외쳐야 했던, 어린 시절의 쓰라림을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리커창 총리는 1974년 봄부터 아버지 고향과 지척인 평양현(어머니 고향)에 내려가 1978년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까지 4년간 농촌에서 ‘썩고’ 있었다.
한국 지식인, 고위 공직자들은 대체로 ‘콧대’가 높다. 프라이드라 해도 되고 강한 자부심과 긍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중국도 결코 만만치 않다. 한중 두 나라 사이엔 총리회담 등 빈번한 접촉과 긴밀한 교류가 진행 중이다. 참고로 리커창의 영어능력에 대한 중국 측의 압축된 촌평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리커창 상무부총리는 5년 동안 발전경제(發展經濟), 개선민생(改善民生), 심화개혁(深化改革)에 협조, 지휘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영문 원서를 읽으며, 영어로 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본다. 특히 그는 쑤두(首都)경제무역대학 교수(미국 자연문학 전공)인 부인의 내조를 받으며 영어 학습을 꾸준히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