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 ① 2인자의 역할과 운명

저우언라이(왼쪽)와 마오쩌둥

27년간 중국 현대사의 한 축 떠받친 저우런라이

“조타수는 조류를 이용해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저우언라이(周恩來)의 말이다.이 말엔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조타수는 저우언라이 자신이고, 조류는 마오쩌둥(毛澤東), 배는 중국혁명 또는 중화인민공화국 즉 공산 중국이다.

저우언라이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만년 2인자’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있다. 그는 1949년 10일1일을 기점으로 1976년 1월 세상을 뜰 때까지 총리를 지냈다. 절대자 마오쩌둥 밑에서 장장 27년을 2인자로 지내자면 어떤 품성, 어떤 성격이어야 할까. 그를 폄훼하는 사람들은 “비겁하다” “교활하다” 혹은 “기회주의자”라고 내려 깐다.

1966년 느닷없이 마오쩌둥이 문화혁명 깃발을 쳐들었을 때, 그는 지방의 지진(地震)과 가뭄 재해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요즘 말로 민생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제1인자 마오는 그의 민생 현장 지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뚱딴지같은 ‘영구혁명’을 들고 나와 공산당 중앙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조류가 잘 흘러야 하는데 조류가 완전히 거꾸로 방향을 튼 것이다.마오쩌둥이라는 조류가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흔히 ‘비겁’과 ‘교활’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화합’과 ‘화해’가 된다. 매사에 단합과 화목을 주장하다보면 기회주의자로 비친다. 때론 비겁하고 교활하게 보이기 쉽다. 문화혁명 10년 동안, 저우언라이는 ‘난폭운전’하는
마오쩌둥 곁에서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운행’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과는 암 발병이었다. 마오쩌둥보다 다섯 살 아래인 그가 여덟 달이나 먼저 세상을 떴다. 그의 죽음은 마오쩌둥 시대 붕괴의 진원(震源)이 되었다.

미국의 전 대통령 닉슨이나 중국 사학자 페어뱅크 같은 이는 저우언라이에 대한 평이 아주 후하다.

“중국혁명에 있어서 마오쩌둥 역할이 지나치게 평가되어 있다. 마오쩌둥 혼자 힘으로 중국을 손에 넣을 수도, 다스릴 수도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흔히 말하는 ‘역사의 만일(萬一)’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오쩌둥 혼자 힘으로가 아니라 마오쩌둥과저우언라이와 동반자 관계로 중국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닉슨의저우언라이 평가다. 페어뱅크는 한 술 떠 뜨는 말을 예사로 했다.

“저우언라이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견(異見)이나 불평에도 곧잘 귀를 기울이며 남의 생각을 끌어안는 큰 사람이었다. 마오쩌둥이 정책노선을 제시하면 그 정책을 실천했다. 저우언라이는마오쩌둥의 혁명이념이 과열될 때마다 이를 견제하여 중국의 단결을 유지하는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이때까지의 중국을 ‘마오쩌둥 시대’라기보다는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시대’라 부른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 이래 공산 중국의 건국에서 문화혁명 종말까지 저우언라이의 역할과 운명을 압축한 말이다. 하지만 중국 어디에도 ‘저우언라이 시대’란 말은 없다. 마오쩌둥에 완전히 가려져 있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을 함부로 내칠 수가 없다. 자칫 ‘자기부정(自己否定)’이 되기 때문이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뜨자 이상기류가 감지되었다. 마오쩌둥 비판과 함께 저우언라이의 공적에 대한 재평가가 솟구쳤다. 공산당은 당황했다. 저우언라이의 미망인 덩잉차오(鄧潁超)가 먼저 강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마오쩌둥의 실책이란 것도 알고 보면 저우언라이와 공동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도마오쩌둥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덩잉차오의 속마음이 얼마나 쓰렸을까.

중국의 경제, 정치를 이끌고 있는 쌍두마차 리커창(왼쪽)과 시진핑

“저우 없었으면 혁명의 불길도 재가 되고 말았을 것”

작년 가을 시진핑(習近平)이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올봄엔 리커창(李克强)이 국무원 총리로 선출되었다. 적지 않은 언론이 중국이 ‘후(胡)-원(溫)’시대에서 ‘시(習)-리(李) 시대’로 넘어왔다고 적고 있다. ‘후-원 시대’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가 나라를 총괄적으로 이끌고 원자바오(溫家寶)가 국무원 총리로 국정 전반에 걸쳐 정부를 이끌었다는 의미가 된다. ‘쌍끌이’다. 그렇다면 향후 5년 내지 10년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국정전반에 걸쳐 책임을 지고, 리커창 총리가 정부를 이끄는 형태가 된다는 말이다.

페어뱅크의 말 대로의 엄격한 의미에서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시대‘란 존재한 적이 없다. 역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과저우언라이를 한 묶음으로 하여 중국 근·현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유효하다. 그들 각자의 역할과 책임의 영역 때문이다.그런 정치적 성격을 압축한 말이 있다. 닉슨의 다음 말이다.

“마오쩌둥이 아니었다면 중국혁명의 불길은 타오르지 않았을 것이고, 저우언라이가 없었더라면 그 불길은 다 타버려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사람을 대비하여 각자의 특성과 역할을 분석한 글들이 적지 않다. 두 사람은 성격과 방법론이 달랐다. 두 사람의 차별성을 간추린 글을 몇 개 옮겨본다.

·마오는 매우 격정적이었고 충동적이었다.
·저우는 이지적이며 침착, 실제적이었다.
·마오는 타협 없이 맞서서 투쟁하기를 즐겼다.
·저우는 관용을 베풀며 예의를 앞세웠다.
·마오는 원칙을 세우고는 오래 유지하려 했다.
·저우는 정세를 봐가며 융통성 있게 대처했다.

어쩌면이들 두 사람의 공생은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동반자, 공생관계가 탄탄하면 나라가 반듯했다. 한쪽 배가 산으로 올라가면 나라는 벼랑 끝에 섰다. 먼저 저우언라이라는 특이한 지도자가 있음으로 해서 마오쩌둥과의 동반자 관계가 존립할 수 있었다.

오늘의 중국 역시 독특하고 희한한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 정치국 상무위원들 중심의 집단지도체제와 ‘당 총서기-국무원 총리’의 두 정상(頂上)체제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 장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제도에 의한 것이다. 덩샤오핑이 깔아놓은 종신집권 폐지, 투명한 권력 승계 등은 탄탄 레일 위에서 움직이는 룰이다. 남들이 아무리 토를 달고 딴지를 걸어도 중국공산당은 이 체제에 대한 효율성을 아직은 신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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