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中의 觀點, 중국 엿보기]⑤ ‘차이나 드림’은 해양강국

중국의 국가목표는 해양강국, 군사대국이다. 사진은 중국 국가해양국 소속 B-3837 항공기에서 촬영한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사진=신화사>

국가해양국 확대개편 “해양경제가 성장 핵심 포인트”

1949년 12월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찾았다. 스탈린 대원수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으로서는 생애 첫 해외 나들이였다. 대표단 구성은 조촐했다. 측근 비서진인 천보다(陳伯達), 왕둥싱(汪東興), 예쯔롱(葉子龍)과 주로 통·번역을 맡았던 스저(師哲).

소련의 위성국 수반들이 모스크바로 몰려들었다. 스탈린의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소련보다 덩치가 큰 나라를 공산국가로 만든 마오쩌둥이었지만 소련은 푸대접으로 일관했다. 마오는 군사차관을 얻기 위해 스탈린에게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대뿐이었다. 자존심 강한 마오는 이런 사태를 미리 예측해 거물급 대표단을 꾸리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이듬해 정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급히 모스크바로 달려왔다. 모스크바 교외 스탈린의 별장에서 한가하게 러시아 피터 대제와 프랑스 나폴레옹 전기에 몰두하던 마오쩌둥은 저우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보기 좋은 것을 챙기고 먹기 좋은 것을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아쉬운 대로 성과는 있었다. ‘중소(中蘇)우호동맹 호조(互助)조약’은 보기 좋은 것이었고, 먹기 좋은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차관 공여 협정’이었다.

중국은 3억 달러 차관을 요구했고 소련은 5년 분할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3억 달러, 당시로선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요즘 중국경제로 보면 ‘코끼리 비스켓’이다. 중국은 첫해 분 6000만 달러도 3분의 1인 2000만 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차관의 일부를 과거 구매대금으로 정산했기 때문이었다. 차관 대부분이 소련제 무기를 사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차관의 절반인 1억5000만 달러는 해군용으로 지정되었다.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둥이 집요하게 스탈린에게 매달렸던 것이 바로 해군 군사력 증강이었다.

‘구룡치해(九龍治海)’란 말이 있다. 아홉 마리 용이 바다를 다스린다? 중국 해양관리의 난맥상을 스스로 빗대어 하는 말이다. 공안부, 교통부, 농업부, 국토자원부, 세관 등에 흩어져 있는 해경(海警), 해사(海事), 해구(海救), 어감(漁監), 어정(漁政), 해감(海監), 밀수단속국, 국경경비파출소, 수색구호센터 등 아홉 개 용이 중국의 넓은 바다를 다스려 왔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 기능을 한 데 묶은 중국국가해양국이 지난 7월22일 새로 출범했다. 과감한 조직개편을 단행한 것이다.

중국 유인 잠수정 자오룽(蛟龍)호가 지난 6월 남중국해에서 수중항법시스템 정밀테스트, 심해생물·지질표본 조사를 위해 잠수하는 모습 <사진=신화사>

중국의 대륙 해안선은 1만8000km, 도서(島嶼) 해안선만도 1만4000km다. 지난해 중국의 해양생산액은 5조 원, 국내총생산(GDP)의 9.7%나 된다. 지난 5월에 발표된은 2030년을 성숙기로 보고 GDP의 15%를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은 해양관리체제와 업무 메커니즘의 역사적인 전환을 야심차게 시도하고 있다. 국가 영향력, 해상역량, 경제실력을 연계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 해양정책의 골간이다. 중국은 해양경제가 세계경제의 주요한 성장 포인트임을 확실하게 인식, 정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7월 말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집단학습도 주제가 ‘해양강국’. 시진핑 집권 이래 관례화된 이날 고위층 자율학습에서 참석자들은 미리 관련서적을 읽고 전문가들의 강연을 들으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시진핑은 “해양강국을 지키면서 주변 국가들과 더불어 해양개발의 지혜를 모으자”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다.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 실체의 베일이 하나둘씩 벗겨지는 느낌 아닌가.

건국 초기 중국이 3억 달러에 목을 맸던 때가 불과 60여 년 전 일이다. 오늘의 중국과 러시아의 위상은 어떤가. 인생무상이라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무상’은 있다. 아니 더 심각하고 변화무쌍한 것이 국제관계다.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건 어려워도 스스로 무너뜨리는 건 잠시잠깐이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중국은 문화혁명이란 대동란을 겪었다. 그 기간 한국은 미증유의 국가발전에 성공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1992년 한중수교 당시를 떠올려 보자. 그리고 오늘의 두 나라 경제 실상을 되짚어 보자. 한국의 국가목표 답이 명증하게 나온다.

‘열린 중국’ 요구하는 신세대·지식인

중국공산당은 오늘의 국가 번영을 공산당의 공으로 확신한다. 소련공산당이 어이없이 무너짐으로써 옛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러시아의 국력과 위상도 주저앉고 말았다고 본다. 그 잘못된 전철을 중국공산당은 밟아선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마오쩌둥은 3억 달러 차관에 목을 매던 시절부터 중국의 군사대국화, 해양강국화를 꿈꾸었다. 마오는 건국 초기부터 군사력의 기초가 되는 중공업 발전에 공을 들였다. 인민이 배고픔에 시달리며 아사자가 속출하던 대약진운동 중이던 1959년에도 마오는 곡물 수출을 강행했다. 핵개발 자금 마련을 위해서였다. 1964년 원자탄 개발에 성공한 중국은 문화혁명 기간 중에도 미사일을 쏘아 올렸다.

‘옛길’과 ‘잘못된 길’ 모두를 배척하겠다고 중국공산당이 으름장을 놓고 있다. ‘옛길’은 쉽게 말해 마오쩌둥 노선을 뜻한다. 돌아가려야 갈 수 없는, 말 그대 ‘옛길’이지만 “자유경제에 적대적인” 좌파의 입김도 만만치는 않다. ‘잘못된 길’은 서구화, 좁게는 미국화다. 기 소르망의 표현을 빌면 “중국인의 심성이 미국화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길’ 배척엔 국수주의적 지식인들마저 가세하는 인상이다. 이들 지식인 그룹은 중국이 “세계화를 강요당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화로 이득을 보는 계층은 자본주의자들뿐이며, 그것은 지극히 물질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중국의 국가목표는 해양강국, 군사대국이다. 사진은 해양구조 훈련 중인 중국 해군 <사진=신화사>

서방에서 말하는 ‘발전’ 개념도 중국의 정신과는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편다. 서방 지식인들이 중국의 세계화를 보편적 가치관, 통상적인 세계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는 반면 그들은 보편적 가치관이란 허상일 뿐 ‘미국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것으로 본다. 현재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헌정(憲政)’ 주장만 해도 중국의 정신과 현실에 맞지 않는 서방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덩샤오핑이 경제는 열고 정치는 닫았던 ‘이원론’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자신의 오른팔 왼팔이나 다름없던 후야오팡(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을 내쳐야 했던 덩샤오핑의 고뇌를 시진핑도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튼 세계는 언론·인권 등에 관련된 중국 지도부의 대응에 주목하고 있다.

중국이 지향하는 강국, 대국의 길이 결코 평탄할 수만은 없다. 시진핑의 ‘중국의 꿈’도 결국은 해양강국, 군사대국이란 중국의 오랜 꿈과 맞물린다. ‘중국 꿈’의 중심에 중국공산당이 있다고 공산당 지도부는 오래 전부터 국민들을 설득해 왔다. 문제는 열린 중국을 주장하는 지식인과 젊은 세대들의 향배이다. 동서고금,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터득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문제는 젊은이와 먹물 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중국도 예외 없이 그런 진실 앞에 노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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