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준 뇌물 25억원에 나라 넘긴 황제 고종

1918년 고종(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순종(맨 오른쪽) 등이 영친왕(왼쪽 두번째)의 조선 방문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맨 왼쪽) 등 총독부 관료들과 덕수궁 석조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시아엔=박종인 <조선일보> 문화부 선임기자] 왜 대한제국은 총 한 방 쏴보지도 못하고 일본에게 망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은 쉽지 않다. 비상식적이니까. 약하고 착한 대한제국이 강하고 악한 일본에게 당했다고 생각해버리면 마음이 편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총을 들 수 없는 어떤 숨겨진 이유가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상식적일 수 있다. 고종에게는 그 상식적인 이유가 있었다. 뇌물을 받은 것이다.

망국 후 이해 불가능한 고종의 반응

1905년 11월 17일 고종은 을사조약에 맹렬하게 반대했던 의정 참정(국무총리) 한규설을 “황제의 지척에서 온당치 못한 행동을 했다”며 파면했다.(1905년 11월 17일 <고종실록>) 그리고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영의정에 해당하는 의정대신 서리로 임명하고(11월 22일), 엿새 뒤 박제순을 정식 참정대신에 임명했다.(11월 28일 <고종실록>)

고종 태도를 성토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역적 두목을 의정대신 대리로 임용해 신으로 하여금 그 아래 반열에 나가도록 하니, 분한 피가 가슴에 가득 차고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러 당장 죽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으면 한다.”(11월 24일 의정부 참찬 이상설) “나라를 주도해서 팔아먹은 박제순에게 총애를 베풀어 의정 서리로 삼고 다른 역적들도 편안하게 권위를 유지시켰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인가.”(11월 26일 정3품 윤병수)

성토를 넘어, 상소는 고종에 대한 불신과 의심으로 발전했다. “삼천리강산을 한밤중에 도둑맞았다. 이제 궁내부에서 헛된 자리에 앉아서 일본인 재정 고문 메가타가 주는 황실비로 풍족히 살면 마음이 편안하겠는가.”(11월 28일 전 내부주사 노봉수) 노봉수는 “국토와 백성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비바람 맞으며 힘들게 마련한 것이지 폐하 개인 소유가 아니다”라고 고종을 정통으로 저격했다.

하지만 고종 답은 한결 같았다. “이처럼 크게 벌일 일이 아니고 또 요량해서 처분을 내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원로대신 조병세를 소두(疏頭)로 궁중에서 농성이 벌어졌다. 고종은 “반복하여 타이른 것이 서너 번만이 아닌데 왜 말을 받지 않는가”라며 이들을 궐 밖으로 쫓아버렸다.(1905년 11월 27일 <고종실록>).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다. 다음날 무관장 민영환이 뒤를 이었다. 민영환이 물러나지 않자 고종은 이들을 체포해 징계를 내리라 명했다.(11월 28일) 이틀 뒤 민영환이 자결했다. 그 다음날 조병세가 자결했다. 함께 울며 위로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천하의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무관심과 푸대접으로 일관했다. 왜 이랬을까.

황제가 받은 뇌물 25억원

“내탕금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해, 심상훈을 통하여 황제 수중으로 2만원을 납입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1주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일본 외무성 기밀 제119호에 의거해 기밀비 10만원을 집행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보호조약 1~3 (195)‘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지난달 4일자 기밀 제119호로써 보호권 확립에 관한 조약체결 등을 위하여 기밀비 10만원을 지출하라는 훈시를 받았습니다. 이토 대사 내한에 즈음해 궁중 내탕금이 궁핍 상태라는 것을 탐지했기 때문에 대사 접대용 비용에 충당하는 명의 아래 금 2만엔을 심상훈을 거쳐서 황제 수중에 납입시켰습니다.”

황제에게 뇌물을 줬다는 것이다. 기밀문서에는 또 ‘3000원은 폐하 좌우에 있는 시종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구완희에게’ ‘3000원은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급여하고’ 나머지 2만원은 조인 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등으로 하여금 선후책으로서 그 부하를 위무시킬 필요상 지급 조치했다고 적혀 있다. 또 참정 박제순 기타 한 두 대신에게 같은 목적으로 지급할 1만5000원을 공제하고 잔액 금 3만9000원은 반납 조치한다고 적혀 있다.

안중근 의사(오른쪽)한테 저격당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

명분은 이토 히로부미 접대비이고, 이유는 ‘내탕금 궁핍상태’였다. 통계에 따르면 5년 뒤인 1910년 서울 숙련 목수 일당이 1엔이었다. 목수 연봉을 200엔으로 가정했을 때(김낙년 등 4명, <한국의 장기통계> 1, 해냄, 2018, p191) 2만원은 이 목수 100년치 연봉에 해당한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연봉은 2500만원이니, 그 100배는 25억원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25억원 뇌물을 받고 나라를 팔았다는 충격적인 문서다. 액수로는 고종-이완용-이지용과 이근택 순이다.

일본 공사관 전원이 받은 훈장

을사조약 전해인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키며 조선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조선 전역을 군사부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는 협정이다.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되고 3월 20일 일본국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알현했다. 실록에는 “황제가 이등박문을 접견했다”고 딱 한 줄 적혀 있다.

그런데 이날 접견식에 배석했던 영접 위원장 민영환은 그달 31일 영국공사관을 방문해 공사 조던에게 이토 방문에 대해 설명을 했다.

‘민영환이 그날 면담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대사는 황제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엔을 줬다.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 후작은 같은 방식으로 50만엔을 궁중 참석자에게 나눠주고, 이번 방문 관계자들에게도 귀중품을 선물했다.’(영국 외무성 자료, 1904년 3월 31일 조던 공사가 랜스다운 외무장관에게 보낸 편지) 30억엔은 현시세로 375억원이다.

3월 20일 고종은 하야시 공사부터 통역관 마에마 교사쿠까지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 ‘전원(全員)’에게 훈1등부터 5등까지 훈장을 내렸다. 나흘 뒤 고종은 이토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을 주고 일행 전원에게 훈장을 내렸다. 그 다음날 이토가 탑승했던 일본 함장 해군대위 두 명에게 또 훈5등 훈장을 내렸다.(1904년 3월 20일, 24일, 25일 <고종실록>)

고종 

“나가 죽으시라”

그 고종에게 이상설이 분노의 붓을 던졌다. “이 조약은 맺어도 망하고 거부해도 망한다. 망하는 것은 똑같은데 어찌 황제는 사직을 위하여 죽으려 들지 않는가(准亦亡不准亦亡也 如等亡焉則 無寧決志殉社)”(1905년 11월 23일 <대한매일신보>)

예나제나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은 비슷하다. 비상식적인 절차를 밟으면 비상식적인 결과가 나온다. 국가 운명이 걸린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국제정치가 구한말과 흡사하다는 소리를 듣는 21세기 대한민국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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