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는 새빨간 거짓말

정조 어진


“성리학이 흥했고 성리학 외에는 탄압됐다”

지구상 모든 변화는 새로운 정보와 사상에서 나온다. 조선 정조시대는 그 변화가 가장 필요했던 시대였고, 변화를 위한 외부 학문이 진입 준비를 완료한 시대였다. 고등학교 시절 배운 바에 따르면 정조시대는 조선시대 르네상스였다. 학문은 부흥했고 상업은 발달했으며 백성은 부유했다. 문예부흥이라고도 배웠고 르네상스라고도 배웠다. 그러했는가?

학문을 말살한 정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스스로를 ‘군사’(軍師)라 불렀다. 군주이며 스승이라 자칭했다. 정조와 논쟁을 벌여서 논리적으로든 지식적으로든 이기는 자가 없었다. 경연을 벌이면 정조는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신하들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과거에 합격해 관리에 임용된 사람들이 마음이 들지 않아, 아예 규장각을 만들어 자기가 신진 관료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르치는 학문 모든 과목이 성리학 일색이었고, 성리학 이외 학문은 이단(異端)으로 규정해 금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정조 때 학문이 흥하고 문예가 부흥했다는 평가는 “성리학이 흥했고 성리학 외에는 탄압됐다”라고 바꿔야 한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1786년 정초에 벌어졌던 ‘병오소회’고 다른 하나는 1792년 본격적으로 진행된 ‘문체반정’이다.

병오소회: 중국과 학술교류 금지

1786년 정월 어느 날 정조가 창덕궁 인정문에서 문무 관리들로부터 신년 국정개혁안을 보고받았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보고서를 제출한 사람은 324명, 제출된 안건은 500건이 넘었다. 목축과 세금에서 무역과 학문에 이르기까지 숱한 개혁안이 쏟아졌다. ‘병오소회’(丙午所懷)라 이름 붙은 개혁안은 훗날 <병오소회등록>(丙午所懷謄錄)이라는 책으로 편찬됐다.

그날 학문에 관해서 정조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중국으로부터 요망妖妄한 서양서적 수입을 금하고 중국인과 학문교류 또한 금한다.” 병오년 음력 1월 22일, 조선 땅에서 학문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1786년 음력 1월 17일 재위 10년째를 맞은 국왕 정조가 문무백관으로부터 변화를 위한 보고서 제출을 명했다. 그리고 닷새 뒤 보고회가 열렸다.

불발된 북학파의 개방 보고서

18세기 개혁사상을 대표한 학파는 북학파다.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한다. 오랑캐로 멸시했던 청나라에서 서양학문과 과학 및 신문물을 목격하고 이를 조선에도 구현하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진 학자와 관리들이었다. 북학파 관료 박제가 또한 보고서를 올렸다. 박제가는 1778년 북경 여행을 통해 근대문물에 눈을 뜬 실용주의 학자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가난이다. 다른 나라는 사치로 인하여 망한다지만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하여 쇠퇴할 것이다. 비단옷을 입지 않아 비단 짜는 기계가 없으니 여인들은 일이 끊겼다. 물이 새는 배를 타고, 목욕시키지 않은 말을 타며, 찌그러진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진흙더미 집에서 지내니 온갖 제조업이 끊겼다. ‘세상이 나빠져서 백성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이는 나라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박제가는 그 대책으로 △중국과 통상을 하고 △서양인을 고용해 기술을 익히고 △사대부에게 장사를 허용하자고 주장했다. “일본과 티베트, 자바섬과 몽골까지 전쟁이 사라진 지 200년이 됐으니 나라를 잘 정비하면 10년 뒤 조선왕국의 거적때기 초가집은 화려한 누각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다. 통상을 허용하고 상공업을 진흥하라는 제안에 ‘만천명월주인옹’ 정조는 시큰둥했다. “그대의 식견과 뜻을 또한 볼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예정된 보고서 – 금지와 규제

사헌부 수장 대사헌 김이소가 보고했다. “북경에서 사오는 책들은 우리 유가의 글이 아니고 대부분 부정한 서적이다. 이를 금하지 않으면 심술을 어그러뜨리고 세도에 끼치는 해가 끝이 있겠는가. 의주 국경에서 책 수입을 수색하고 적발되면 의주 부윤까지 처벌하시라.”

정조는 즉각 의정부에 입법을 지시하고 평안도에 대책회의를 명했다. 사간원 수장 대사간 심풍지가 보고했다. “정월 초하루에 일식(日蝕)이 발생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기강이 없고 귀천이 없어서이다. 중국에 간 사신들이 그 나라 사람들과 만나고 편지와 선물을 주고받는다.”

서학(西學)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심풍지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물이 기강 문란의 원인이니 이를 금하라는 것이다. 정조가 답을 내렸다. “금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 처벌방안을 마련하라.” 이로써 외부로부터 신문물이 도입될 통로는 공식적으로 차단됐다.

애당초 정조는 이 학술교류 금지책을 염두에 뒀던 듯하다. 정조는 병오소회 바로 전날 이들 김이소와 심풍지를 대사헌과 대사간에 임명했다. 조정에서 가장 ‘말발’이 센 자리에 앉혀놓은 뒤,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들 입으로 대신 하게 만든 것이다. 서적수입 및 인적교류 금지조치는 그 자리에서 비변사에 의해 법령으로 공식화됐다.

즉 △중국 사람들과 개인적 왕래 금지 △필담 금지 △선물 및 편지 금지 △적발 시 압록강 도강 후 처벌 △요망한 이단서적 수입금지 및 적발 시 분서(焚書) △적발 실패한 의주 부윤은 처벌 등이었다.

박제가가 제안한 통상과 교류는 전면 부정됐다. ‘성리학적 기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학문 서적은 금지됐다. 이듬해 가을 이 금지령이 구체화됐다. 범법자는 즉시 조선으로 압송해 장을 치고 상관도 연좌시키고 책은 불태우며 이를 감독하지 못한 서장관은 의주에 유배를 보낸다는 처벌조항이 삽입됐다.

문체반정과 연암 박지원

5년이 지난 1792년, 이번에는 중국서적 일체에 대해 수입 금지령이 떨어졌다. 정조가 이리 말했다. “질기고 글자도 큰 조선 책을 두고 왜 얇고 글씨 작은 중국책을 보는가. ‘누워서 보기 편하기 때문’ 아닌가. 이게 어찌 성인 말씀에 대한 도리인가.” 아예 이단의 유입 통로를 끊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One comment

  1. 무식한 기자 선생. 조선왕조는 성리학이 범접못할 최고학문임을 그 누가 모르랴. 성리학의 존엄성을 어찌 부정하랴. 그 틈을 비집고 어떤 사상과 지식이 들어왔는가를 살피는 게 역사의 본질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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