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국민을 위한 정부’

세종대왕 표준영정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박종인 조선일보 선임기자, <아시아엔> 편집위원] 1450년 세종 32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상소를 올렸다. “모름지기 (적에게) 한번 대승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나라를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1450년 1월 15일 <세종실록>) 고려를 타도하고 새 왕국을 선지 60년이 채 안된 때였다. 그때 국방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양성지가 국왕에게 건의한 것이다. 건국 초기, 조선은 문약(文弱)한 나라가 아니었다.

양성지가 이런 상소를 하기 2년 전, 세종이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각 지방 육해군 사령관에게 문서 한 권을 보낸다. 무기 주조 방식과 화약 사용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군국에 관한 비밀의 그릇이다. 항상 비밀히 감추고 하급 관리 손에 맡기지 말라. 임무 교대 때는 이 문서를 직접 인수인계하라.”(1448년 9월 13일 <세종실록>)

집권한 지 만 30년 한달 되는 1448년 음력 9월 13일, 조선 4대 군주 세종은 신무기 시스템 구축 완성을 선언했다. 3년 전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 감독 하에 진행해온 군사 프로젝트였다. 육군과 해군에 전달된 문서 이름은 ‘총통등록(銃筒謄錄)’이다. 화약 제조법과 화살과 탄환을 쏘는 화약무기 제작법을 담은 기밀문서다.

등극 14년째인 1432년 한 번에 화살 두 개를 쏘는 쌍전화포를 시작으로 세종은 꾸준히 무기 개량 작업을 벌여왔다. 이미 그 3년 전에도 개량된 무기들은 소비되는 화약 양은 동일하고 사정거리는 두 배가 될 정도며 적중률도 만족스러웠다. 이후 개량작업이 이어져 이날 완성을 본 것이다. 그 사이 최장 900보였던 사정거리는 1500보까지 늘어났다. 건국 56년 만이었다. 여진족과 대마도를 정벌한 군사력은 이 같은 강병(强兵) 기술이 기초가 됐다. 그때 조선은 문약하지 않았다.

문약(文弱)의 결과

왜 임진왜란 때 조선육군이 초기에 궤멸됐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안다. 세종 이후 150년 동안 유비무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책을 읽었고 농민들은 쟁기와 낫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 사이 국방은 와해됐다.

1543년 이웃 일본이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화승총인 아쿼버스(arcabuz)를 수입해 신무기체제로 진입하는 동안 세종이 갈고 닦았던 첨단 무기들은 무기고에서 나오지 않았다. 전쟁 발발 3년 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총 3정을 선조에게 진상했지만 그 무기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장 신립에게 정승 류성룡이 조총의 화력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신립은 조선 활을 맹신했다. 결과는 탄금대전투 대패전으로 귀결됐다. ‘한번 대승해야 적이 무서움을 알게 되리라’고 했던 양성지의 예언은 역으로 조선을 공포로 몰아넣은 전란으로 귀결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1875년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입에 있는 부대인 초지진을 포격했다. 그때 부대를 지휘하던 영종첨사 이민덕은 즉시 도주하고 병사 35명이 전사했다. 9년 전인 1866년 세계 제일 프랑스함대와 혈전을 벌이고(병인양요) 4년 전인 1871년에는 남북전쟁을 치른 베테랑 미국 해병대와 사생결단을 벌였던(신미양요) 그 조선군이 모함 한 척과 상륙함 한 척으로 구성된 일본해군을 맞아 전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했다. 조선정부는 교전 및 교전 종료 사실을 사흘 뒤에 보고받았고 그 사실을 차마 중국에 보고하지도 못했다.

명성황후(왼쪽)와 대원군으로 추정되는 사진


대원군의 국방정책 – 강병

서해에서 적 군함이 한양으로 침투하려면 강화도와 김포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 염하(鹽河)를 통과해야 한다. 염하가 뚫리면 한강으로 곧바로 진입하고 이어 양화진까지 적 군함에게 통로를 내주는 일이 벌어진다.

대원군 집권기인 1866년 병인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했다. 문관인 강화유수 이인기는 프랑스군 포격과 함께 도주했다. 병인양요는 한달 만에 프랑스군이 퇴각함으로써 끝났다. 형식적으로는 조선 관군의 승리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강화도 주민이 도륙되고 외규장각에 있던 보물과 서적이 약탈당하는 참패였다.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강화도에 있던 부대 진무영(鎭撫營)을 대폭 강화했다. 양요 와중인 9월 9일 대원군은 도주한 강화유수 이인기를 전격 파면하고 무장인 우포도대장 이장렴을 강화유수 겸 진무사로 임명했다.(1866년 고종 3년 9월 9일 <승정원일기>)

진무영은 이후 각 부속부대 병력이 급증해 1874년에는 총 병력수가 3500명에 달했다. 그때까지 강화도는 오합지졸인 속오군 400~500명이 지키고 있었으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 열 배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 조선 왕국 입구를 방어하게 된 것이다. 대원군은 전국에서 ‘심도포량미’라는 군사용 세금을 거두고 서울 각 부대에 있던 대포와 화약을 진무영으로 이관시켰다.

강화된 군사력은 1871년 미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 때 ‘결사항전’과 ‘장엄한 전멸’로 귀결됐다. 총 한 번 쏠 엄두도 못 내고 대장이 도망갔던 병인양요와 달리 신미양요는 쏠 총과 쏠 대포가 있었고, 그 총과 대포로 천하무적 미 해병대와 백병전을 치를 병력이 있었다. 비록 백 대 빵의 전력 차로 어이없는 전멸로 끝나버린 전투였지만, 그들이 강화도 갯벌에 뿌린 피는 장엄했다.

고종


아들 고종의 국방정책

한 나라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이다. 행복을 위해 부국(富國)을 해야 하고 안전을 위해 강병(强兵)을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을 상실하면 그건 정부가 아니다. 대원군을 10년 만에 권력에서 몰아내고 친정을 하게 된 고종 정부는 그 두 가지 임무에 소홀했다.

고종이 친정을 선언하고 5개월이 지난 봄날. 고종이 대신들과 함께 회의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군사가 정예하지 않다. 대국은 이와 같지 않다.”(1874년 고종 11년 4월 5일 <일성록>) 영의정 이유원은 “병력 증원은 군사예산를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답했다. 그달 12일 고종은 또다시 병력 증원 문제를 꺼냈다. 이유원은 “호조와 병조 회의 결과, 군량미가 7000석이나 부족한 실정”이라며 군사 증원이 불가능하다고 보고서를 올렸다.(1874년 고종 11년 4월 12일 <일성록>) 13일 뒤 고종이 마침내 이렇게 선언했다.

“궁궐 안에 근무하는 군병이 400명밖에 되지 않아 염려해왔다. 몇 명쯤은 증원하는 것이 좋겠다.”(1874년 고종 11년 4월 25일 <고종실록>) 영의정 이유원이 “재원을 확보한 다음에 논할 일”이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고종이 즉각 대안을 제시했다. “각 영의 군병 가운데 몇 명을 차출하여 궐내 가까운 곳에 입직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5월 25일 삼군부를 지휘하는 지삼군부사 이경하가 각 부대에서 100명씩 차출해 다섯 당번으로 무위소를 운영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고종은 선혜청(대동미를 관리하는 관청) 비축미 1000석과 호조에 있는 포량미(砲糧米) 700석으로 군량미를 충당하라고 지시했다. 포량미는 대원군이 강화도 진무영을 위해 확보한 세금이다. 그 군량미를 궁궐 수비대 예산으로 전용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1874년 6월 20일 궁궐 수비대, 무위소(武衛所)가 공식 출범했다. 그때까지 수비대 이름은 파수군(把守軍), ‘파수꾼’의 그 파수군이었다. 화재를 예방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정도로 기능하던 그 파수꾼이 이제 ‘힘’으로 주군을 ‘호위하는’ 무장부대로 변신한 것이다.

7월 8일 무위소는 기마대 238명을 비롯한 훈련도감 463명을 차출 받았다. 사흘 뒤 금위영과 어영청으로부터 각각 183명과 181명을 차출 받아 무위소는 순식간에 정예 군사 828명을 거느린 대규모 부대로 몸뚱이가 커졌다. 지금으로 치면 2개 대대(900명)에 이르는 부대다. 500명으로 예정했던 무위소 병력은 800명이 넘었다. 그리고 고종 명에 의해 무위소는 일반 군무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을 통속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대원군이 창설했던 실질적인 군 최고사령부 삼군부는 이름만 남았다.

그해 9월까지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에서 추가로 차출된 병력 총합이 1270명이었다. 기존에 있던 궁궐 숙위대 용호영 병력 600명을 합치면 이미 신설 후 몇 달 만에 2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확대된 것이다. 1879년 8월 29일 무위소는 북한산성을 방위하던 경리청 병력을 상급부대인 총융청에서 빼내 자기 소속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무위소는 1880년 현재 총병력 4399명, 장교와 부사관 각 356명, 32명에 수송부대, 취악대 등 부속부대를 제외한 전투 병력만 2371명에 이르는 막강 군단으로 변모했다.

무위소는 한성에 흐르는 각 개천 준설공사를 주관하고 돈을 발행하고 군수품 제작용 대나무와 쌀, 돈, 나무, 옷감 상납을 관리하는 비군사적 행정까지 개입해 그 관리들을 처벌하는 권한까지 행사했다. 1876년 11월 경복궁에 또 불이 나자 화재에 사라진 어보와 도장을 무위소에서 주조했다. 창경궁 수리, 산성 성곽 보수, 소나무 벌채 감시도 무위소 소관 사항이었다. 지방부대 감찰 또한 무위소 소관이었다. 토목공사부터 조폐공사까지, 무위소는 없는 곳이 없었고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라진 진무영

대원군이 구축해놓은 지방과 중앙 군사는 급속도로 위축돼갔다. 1876년 10월 29일 훈련도감이 고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훈련도감 군사 수가 전보다 많이 줄어 각 영에 입직할 군사를 배정하기 어렵다. 남영(南營‧창덕궁 돈화문 앞에 있는 부대)에 근무하는 군사 40명 중에서 10명을 줄이려고 한다.” 한 달 뒤 훈련도감에서 또 보고가 올라왔다. “본국의 군사 수효가 전보다 감소하여 지방 각 영에 입직할 인원을 배정하기가 어렵다.” 지방이든 중앙이든, 군부대에 하루하루 부대 정원을 채울 수가 없어서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보고였다.

1874년 7월 28일 고종은 측근인 조병식을 강화유수에 임명했다. 조선 왕국, 나아가 대한제국 앞날을 캄캄하게 만든 인사 조치였다. 조병식은 문신(文臣)이다. 고종은 당시 진무사였던 무신 신헌으로부터 강화유수 권한을 박탈하고 측근 문신을 강화유수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듬해 진무영 예산으로 사용하던 강화도 인삼세 가운데 4만 냥을 무위소로 이관시켜버렸다. 인삼세는 1881년 11월까지 전액 무위소로 이관됐다.

결국 1881년 11월 현재 진무영 각 군영 경비와 병사들 봉급은 10개월 넘게 밀려 있었고, 1882년에는 군량미 부족으로 인해 진무영 병력이 절반으로 감축됐다. 심지어 기존 국왕 호위부대인 어영청 또한 쪼그라들었다. 대원군시대인 1872년 어영청이 보유한 조총은 3868자루였는데, 무위소 설립 후인 1875년에는 3750자루로 감소해 있었다. 화약은 4만6624근에서 31980근, 탄환은 116만6798개에서 자그마치 24만5430개로 급감해 있었다.

이미 그때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을 거쳐 조선에 정식 조약 체결을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대원군파였던 정승 박규수는 재야로 물러난 대원군에게 편지를 썼다. “일본이 포를 한 번 쏘고 나면 문서를 받고자 해도 받을 방법이 없을 터입니다.”(박규수, <환재집> 11권 ‘대원군에게 답하는 편지’ 1875년 5월)

운요호


일본 군함의 포격과 녹슨 총

그런 상황에서 넉 달 뒤인 8월 21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포격한 것이다. 일찌감치 근대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일본이, 그 근대화의 성과물인 군함을 몰고 조선에 나타나, 자기네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당했던 그대로 포를 쏘며, 조선에 개국을 강요한 것이다. 조선해군은 포로 16명, 전사 35명. 대포 365문과 화승총 130여 정을 약탈당했다. 일본 해군은 부상자가 2명이었다.

이듬해 1월 조약을 요구하는 일본 측 보고를 받는 어전회의에서, 고종 면전에서, 판중추부사 박규수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울 정책을 다했다면 부국강병을 이루었을 터이다. 어찌 감히 서울을 넘보며 방자하게 굴게 되기에 이르렀는가?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가 없다.”(1876년 고종 13년 1월 20일 <고종실록>)

목구멍을 지키던 군사는 조락하여, 모두 군기가 빠진 채 도망가고 말았다. 대원군은 가슴을 어루만지며 “이 군영이 국가에 무슨 해를 끼쳐서 그 장성(長城)을 파괴하는가?”라고 하였다.(황현, <매천야록> 1권 上 ‘강화도 무위영의 철폐’)

1884년 겨울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일행이 창덕궁 무기고를 열었을 때, 김옥균은 경악했다. “각 영에서 보유하고 있는 총과 칼이란 죄다 녹슬어서 처음부터 탄환을 장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각 사관들에게 병정을 데리고 총을 모두 분해하여 소제하게 하였다.”(김옥균, <갑신일록>)

해군의 잘못된 부활과 망국

1903년 1월 25일 대한제국 군부대신 신기선이 일본 미쓰이물산과 군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 군함 이름은 훗날 ‘양무호(揚武號)’라고 지었다. 4월 15일 인천 제물포항에 입항한 양무호에는 80㎜ 대포 4문과 5㎜짜리 소포 2문이 장착돼 있었다.

그런데 정박해 있는 이 군함을 살펴본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고물인 데다가 누수까지 되어 빨리 항해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인을 고용하여 수선 작업을 벌이는 바람에 전후에 걸쳐 거액의 비용이 소모되었다.”(황현, <매천야록>, ‘1903년 일본군함 양무호 구입’)

이 군함 계약 부속 명세서는 다음과 같다. ‘군기(軍器)는 적당히 완비할 일’ ‘순양함 혹은 연습함의 목적에 변통함을 위함’ ‘식당에는 미려한 서양 요리 기구 30인분’ ‘사령관 이하 함장 사관 25인 침구는 화려한 서양 물품으로 완비’ ‘일체 무기는 적당히 탑재’ ‘각 구경 대포 실탄 외에 예포(禮砲) 연습용 공탄과 소총 탄환도 물론 적당히 둘 일’.

가격은 ‘일화 55만엔’, 110만원이었다. 그해 대한제국 군부 예산은 세출 기준으로 412만3582원이었다. 한 해 국방예산 26.7%를 투입한 배가 그러했다. 그것도 중고로. 지금이라면 줄줄이 사법 조치될 일이었으나 만사형통으로 넘어간 이유가 있었으니, 명세서 둘째 항목에 세 줄로 적혀 있는 조건 덕분이다. ‘접객실을 특설하여 대한국 황실 경절 때 봉축에 공할 일.’ 당시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은 이렇게 기록했다. ‘1903년 1월 군부대신 신기선이 약 55만원(엔) 상당 전함을 일본으로부터 구입하는 발주 계약을 체결함. 이는 어극 40년 칭경예식을 위해 발주한 것임.’

해군과 무관했다. 자주국방과도 무관했다. 오로지 40주년을 맞은 고종 황제 폐하 등극 기념식에 황제를 선상에 앉혀놓고 예포 몇 방 쏘려는 게 고물 중의 상고물 양무호를 수입한 이유였다. 미쓰이물산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는 양무호의 관리비와 원금, 이자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해군 창설도 취소됐다. 1909년 11월 29일 대한제국 정부는 경매를 거쳐 양무호를 일본 오사카의 하라다상회에 매각했다. 110만 원짜리 군함 낙찰 가격은 4만2000원이었다.(1909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 그리고 1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양성지의 기개와 세종의 실천력이 실종됐던 탓이다. 지금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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