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留美幼童)
[아시아엔=이강렬 미래교육연구소 소장, 전 <국민일보> 편집국장] 조기유학이라고 하면 중학교 2~3학년부터 고등학교 1~2학년까지 해외 나가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 많은 어린 학생들이 부모의 교육설계 아래 미국 등 여러 나라로 조기유학을 떠난다.
그런데 지금부터 150년 전 중국, 즉 청나라에선 9살에서 15살 사이의 어린이들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나라는 겨우 12살 내외의 아동을 대거 미국 유학을 보내 근대과학을 배우도록 했다. 지금처럼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몇 달을 배를 타고 가야 하는 험난한 유학 길이었다.
청나라 정부가 이렇게 미국에 어린이들을 유학 보낸 이유는 이들을 공부시켜, 낡고 지친 나라를 변혁해 튼튼한 국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1870년대 일본도 정부 차원에서 젊은 청년들을 대거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청나라보다 더 일찍 더 많은 유학생을 미국에 보냈고, 청나라가 어린 유학생을 보낼 즈음 벌써 일본 유학생들은 대학 졸업생이 배출된다.
당시 조선의 고종 임금을 섭정하던 대원군은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척화비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은 여전히 캄캄한 밤길을 등불 하나 없이 걷는 초라한 나그네 모습이었다.
청나라 어린이들은 1872년 8월 11일(음력 7월 8일) 무리 지어 상해에서 정박 중인 배에 올라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한다. 청나라는 이후 1875년까지 4차례에 걸쳐 모두 120명의 유동(幼童)을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에 보낸다.
그들은 당시 세계 최고 문명국가인 미국에서 남북전쟁의 영웅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접견했고, 벨이 전화 만드는 것과 에디슨이 유성기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문명의 신화를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그들 가운데 50명은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MIT 등 미국 최고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그 대학들의 문서보관소에 가면 당시 청나라 유미유동(留美幼童)들의 입학허가증, 사진 등이 그대로 있다고 한다.
조선의 경우 1884년, 그러니까 청나라보다 10년 뒤늦게 개화파인 유길준이 28살의 늦깎이로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고등학교인 덤머 아카데미(지금의 거버너스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고국 조선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소환을 받고 1885년 6월 귀국한다. 당시 중국 유학생들은 하버드, 예일, MIT를 졸업했는데 조선 유학생은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 이게 1880년대 조선의 모습이었다.
다시 청나라 이야기로 돌아가자. 청나라는 15년에 걸친 유학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10년 만에 청나라 정부 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눈앞에서 계획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유동들이 유학 중간에 소환당한 것이다. 그들은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 초기까지 중요 역사 고비마다 큰 일을 했다. 일부는 청-프랑스, 청-일 해전에서 전사를 했고, 일부는 정치 실력자 리홍장의 막료가 되었다. 군벌 위안 스카이의 고문도 됐으며 청나라 정부 대신도 나왔다. 또 그들 가운데는 중화민국 초대 총리도 배출됐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이 엄청난 유미유동 프로젝트를 입안했을까? 그리고 누가 이 프로젝트를 이끌었을까? 이야기는 유미유동 학생들이 떠난 1872년보다 25년 앞서 미국 선교사를 따라 미국 유학을 떠난 3명의 아동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푸젠성(복건성)의 한 시골에서 선교사 도움을 받아 공부를 하던 룽훙, 황콴, 황성 등 세 어린이는 귀국하는 미국 선교사 브라운 목사를 따라 1847년 1월5일 홍콩에서 미국 배 헌트리스호에 올라 미국으로 유학 간다.
98일 동안 배에서 심한 뱃멀미를 시작으로 8년간 미국 유학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룽훙은 그 8년 뒤 예일대를 졸업한다. 그는 예일대 입학 전에 매사추세츠주의 몬슨고등학교에서 영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배운다. 함께 유학 왔던 친구 황성은 병을 얻어 1848년 중국으로 돌아갔고, 또 다른 친구 황콴은 몬슨고등학교 졸업 뒤 영국으로 가서 에딘버러대학교 의대에 진학했다.
룽훙은 26살 나이로 1854년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42살 중년이 된 때 그가 생각해 왔던 ‘유학 프로젝트’를 청나라 정부에 보고했다. 그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로 청의 정부를 설득했다. 선발 방법도 이렇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각 성에서 총명한 아이들을 선발하되 매년 30명씩 4년간에 걸쳐 120명을 유학 보낸다. 외국에서 유학한 지 15년이 지나면 떠나간 순서에 따라 차례로 귀국을 한다. 중국으로 돌아올 즈음이면 아이들은 30살 가량이 되어 있을 것이고, 한창 혈기가 왕성한 나이에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리라.”
청나라의 유미유동 프로젝트는 안타깝게 실패했지만, 유미유동들은 조국 청나라와 이후 중화민국을 위해 큰 인물이 된다. 본래의 계획대로 실행됐으면 지금의 중국은 더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