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근대화’ 이끈 ‘재계의 신사’ 송인상 능률협회 명예회장 타계

[아시아엔=최정아 기자] 제1공화국에서 부흥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경제계 원로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이 22일 별세했다. 송인상 명예회장은 ‘건국 1세대’로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매일경제>는 ‘재계의 신사 송인상 영원히 잠들다’는 제목 아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송 명예회장이 EC대사를 맡고 있던 시절에 ‘유럽 시장 수출을 임자 임기 내에 두 배 끌어올려달라’는 특명을 내렸다. 송 명예회장은 능숙한 외국어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 유럽 시장을 공략하면서 국내 업체들이 경쟁력 있는 아이템을 발굴해 적극 육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2년 후 한국의 대유럽 수출은 10억달러까지 늘어나 ‘기적의 대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능률협회 명예회장 101세로 별세’ 제목으로 “지난 2012년 펴낸 자전적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선 그의 삶을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밖에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은 ’60~70년대 경제 근대화 이끈’재계의 紳士’, ‘경제개발 3개년 추진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별세’란 제목으로 송 명예회장을 추모했다. <아시아엔>은 이들 신문 보도를 옮겨싣는다. -편집자

<매일경제> ‘재계의 신사’ 송인상 영원히 잠들다?

대한민국 경제 도약의 주역이자 건국 1세대 마지막 산증인이 향년 101세로 타계했다. ‘재계의 신사’로 불리던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효성그룹 고문)이 22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따로 없었다. 그가 살아생전 숱하게 토로했던 “가난한 조국에 내 모든 걸 바치고 싶었다”던 한마디가 남은 이들에게 더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나라가 가난했기에 죽을 각오로 공부했고, 해외에 나가서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수출을 했고, 말년에는 자신의 길을 이을 인재를 키웠던 그의 삶은 ‘대한민국 기적의 역사’ 그 자체였다.

강원도 회양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졸업한 송인상 명예회장은 재무부 이재국장과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1957년 부흥부(전 경제기획원) 장관과 1959년 재무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의 수장을 맡았다.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초석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황소 같은 추진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송 명예회장이 EC대사를 맡고 있던 시절에 “유럽 시장 수출을 임자 임기 내에 두 배 끌어올려달라”는 특명을 내렸다. 송 명예회장은 능숙한 외국어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해 유럽 시장을 공략하면서 국내 업체들이 경쟁력 있는 아이템을 발굴해 적극 육성하는 정책을 폈다. 그 결과 2년 후 한국의 대유럽 수출은 10억달러까지 늘어나 ‘기적의 대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은 1976년 송 명예회장을 초대 수출입은행장으로 임명하면서 수출보국의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겼다. 기업이 끌고 정부가 미는 대한민국 수출의 성장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원조 당국은 원조 자금을 주로 농업 분야에 사용해야 한다는 네이선(Nathan) 보고서를 들고 나왔지만 당시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이던 송인상 명예회장은 공업에 투자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건설된 것이 충주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그리고 디젤기관차를 도입한 철도 산업 등이었다.

관료 퇴직 후 민간 경제 부문에 투신한 이후에는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거치며 산업 발전과 국제경제 교류에 앞장섰다. 20여 년간 한국능률협회를 이끌면서 재계의 큰 어른으로 올바른 기업가상을 전파하고 한국 산업교육의 선진화에 힘썼다.

고인은 재계 혼맥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사위로는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전 상공부 장관),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이 있다.

고인의 장녀인 송원자 씨는 이봉서 회장과 결혼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이혜영 씨는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 아들인 정연 씨와 결혼했다. 차녀 송길자 씨는 신명수 회장과 결혼했는데 장녀 신정화 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최태원 SK그룹 회장 처남인 노재헌 씨와 결혼했다. 조현준·조현문·조현상 효성 3형제는 송인상 명예회장의 외손자다.

<중앙일보> 능률협회 명예회장 101세로 별세

제1공화국에서 부흥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지낸 경제계 원로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이 22일 별세했다. 101세.

송 명예회장은 서울대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오다 노환이 악화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세기가 넘는 삶을 마감했다. 우리나라 건국 1세대의 마지막 증인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2012년 펴낸 자전적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선 그의 삶을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실제 고인의 인생 전체가 조국의 경제발전과 연결돼있다. 강원도 회양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와 서울상대 전신인 경성고상을 졸업하고 해방 후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신생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2개 부처 장관직을 두루 거쳤다. 6·25전쟁 후 미국을 비롯한 원조당국은 원조자금을 주로 농업분야에 사용해야 한다는 ‘네이산(Nathan) 보고서’를 들고 왔지만 당시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이던 고인은 공업에 투자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산업화의 기틀이 된 충주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등을 지을 수 있었다.

3공화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유럽공동체(EC) 대사로 재직하며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끌어올려 ‘기적을 만든 대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박 전 대통령이 1976년 고인을 초대 수출입은행장에 임명하기도 했다.

1980년 동양나이론 회장에 취임하면서 민간 경제부문에 몸담았다.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특히 한국능률협회 회장을 20여 년간 맡으면서 올바른 기업가상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고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2007년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이보다 앞선 91년에는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수교훈장 광화장, 2004년 한미협회 한미우호상을 받았으며 2007년에는 국제평화 증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제로타리 최고영예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동진씨(사업가)와 딸 원자·길자·광자·진주씨가 있다.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전 상공부 장관),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전 전경련 회장), 주관엽씨(사업가)가 사위다.

<조선일보> 60~70년대 경제 근대화 이끈 ‘재계의 紳士’

송인상(宋仁相·101)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이 22일 오후 2시 5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1960~1970년대 한국 경제 근대화 및 성장의 주역이었던 송 명예회장은 경제 관료와 민간 기업을 두루 거친 한국 재계의 대표적 원로로서 한국 경제계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 풍부한 식견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경제 외교를 주도했으며 ‘재계의 신사(紳士)’로 불렸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2012년 송 명예회장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한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서 그를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이라고 했다. 이 평전에서 송 명예회장은 자신의 삶을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는 말로 요약했다.

1914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상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1949년 재무부 이재국장으로 신생 정부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부흥부 장관을 맡아 ‘농업이 아닌 공업에 투자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재무부 장관 시절에는 한국 최초의 장기 경제개발 계획인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해 후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틀도 마련했다.

그는 1960년 4·19혁명 후 다른 관료들과 함께 3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3공화국 때 다시 중용됐다.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임명으로 1974~1976년 EC(유럽공동체) 대사로 재직하던 동안 한국의 대(對)유럽 수출은 3억달러에서 10억달러로 늘었다. 19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을 맡았다.

송인상(가운데)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이 1982년 산업 시찰(視察)을 위해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송인상(가운데)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이 1982년 산업 시찰(視察)을 위해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과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회장과 함께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걸어 나오고 있다. /한국능률협회 제공

1980년 동양나이론 회장 취임을 계기로 기업계에 몸담았으며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한국능률협회 회장, 한미(韓美)협회 회장, 국제로타리 이사 등을 거쳐 효성그룹 고문과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2007년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같은 해 국제로타리 영예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송동진(사업)씨 등 1남 4녀가 있다.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전 상공부 장관),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주관엽(사업)씨가 사위다.

<경향신문> ‘경제개발 3개년 추진’ 송인상 전 재무부 장관 별세

재무부 장관과 초대 한국수출입은행장을 지낸 송인상 한국능률협회(KMA) 명예회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강원도 회양 출신으로 선린상업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를 졸업한 송인상 명예회장은 1957년 부흥부(전 경제기획원) 장관과 1959년 재무부 장관 등 주요 경제부처의 수장으로 지내며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1974년 EC대사(벨기에·룩셈부르크 대사 겸임) 시절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끌어올렸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송인상 명예회장을 1976년 초대 수출입은행장에 임명했다.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을 맡은 송인상 명예회장은 농업이 아닌 공업에 투자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충주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디젤기관차 도입 등을 도입했다.

송인상 명예회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원조 당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을 정부청사로 쓸 수 없다고 하자, 송인상 명예회장은 돈도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원조 당국에 쌍둥이 청사를 지어 하나씩 사용하자고 제안해 문제를 해결한 일화가 있다.

송인상 명예회장은 민간부문에서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국위원장 등을 거쳤으며, 20여년간 한국능률협회를 이끌며 올바른 기업인상 전파에 힘썼다.

송인상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1991년에는 한·미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수교훈장 광화장과 2004년 한미협회 한미우호상을 받았다. 국제 평화 증진에 힘쓴 공적을 인정받아 2007년 국제로타리 최고영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동진(사업가)씨와 딸 원자·길자·광자·진주씨가 있으며,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주관엽(사업가)씨가 사위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02-2227-7550)이며, 영결식은 25일 오전 6시 30분 열린다. 장지는 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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