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옥의 추억창고] 가족사진의 향수

<사진=유현옥>

그 즈음, 시내 중심가에 있던 사진관 진열장에는 으레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 70년대는 경제개발프로젝트와 함께 가족계획이 정부의 잘살기 정책으로 이루어졌고,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구호와 함께 핵가족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근대적 개념의 가족이 형성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 시절, 가족사진찍기는 단란한 가정의 상징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남녀도 사진을 찍음으로써 앞으로 가정을 이룰 예비부부임을 공표하였고, 자녀들이 하나 둘, 성장해가며 가정의 중요한 기념일에 사람들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기 위한 외출은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특별의식이었다.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서 이상적인 가족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상징기호가 아니었을까?

북한에서 혈혈단신 남하하신 나의 아버지는 결혼기념일에 가족사진 찍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런 의식을 통해서 가족의 끈끈함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마그네슘으로 ‘펑’하고 터지는 불빛은 약간의 긴장감을 주며 사람들 표정을 정지시키는데, 나는 그 불빛에서 항상 눈을 감아버리는 습성이 있었다. 옛 앨범에서 찾아낸 나의 가족사진에서도 나는 반쯤 눈을 감은 모습이다. 눈을 감는 순간에 찍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진에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가족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어서 여러 사진 중에서 오래 기억되는 사진이기도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 셋, 아들 하나, 또 한동안 우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장사를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요것조것 우리 일상의 빈틈을 잘 살펴주셨던 외할머니. 그 시절 모든 가족이 담겨있는 사진이다. 아마 우리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딸만 셋 두고 허전하셨던 부모님이 금쪽같은 아들을 두셔서 늘 멋쟁이로 입히시고 귀여워하셨고, 맏이인 나와 그 밑의 동생은 국민학생이었다. 사진에서는 교복을 입고 있다. 막내 여동생은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은 미취학생. 학비부담도 아직 크지 않았을 이 시절, 물질적으로도 가장 풍요했다. 외식도 하고 가족 나들이도 하는 등 가족문화를 풍성하게 누렸던 우리의 어린 시절은 돌이켜보면 참 든든한 자양분이다.

오래된 앨범에서 요즘 다시 찾은 이 사진이 내 형제 자매에게 팍팍한 현실을 이기는 작은 위로가 된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지친 어깨를 살며시 품어주는 것 같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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