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옥의 추억창고] 엄마표 손재봉틀

<사진=유현옥>

재봉틀을 보면 언니들이 생각난다. 60, 7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 과정에서 봉재산업 일꾼이던 언니들에게 재봉틀은 ‘꿈이자 절망의 대상’이었다. 열악한 고용환경과 저임금은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게 했으나 그래도 그 일을 거부하게는 못했다.

절대빈곤에 놓인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 또는 오빠를 교육시켰던 언니들은 그들 가정에 희망의 통로였다. 그들의 경제활동이란 것은 실상, 가정에서 일어나는 가사노동의 확장이었다. 봉재산업 역시 그러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봉재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재봉틀은 가정에서 쓰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손이나 발 대신 전기를 이용해 순식간에 작업이 이루어져 잠깐 실수로도 큰 상해를 입을 수 있는 ‘기계’였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공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사촌동생이 있었는데, 이 아이가 다니던 봉재공장에서 손을 다친 적이 있다. 치료를 제때 해야 하는데도 공장에서 잘 처리해주지 않아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가평에 사는 이모는 춘천에 있는 우리 집을 찾아와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나는 우리지역 노동사무소를 통해 그 회사에 항의를 한 적이 있다. 그런 현실이 몹시도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이보다 더 기막힌 사연들이 우리 언니들 가슴에 아직도 담겨 있을 것이다.

사진의 재봉틀은 손으로 돌리는 가정용으로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쓰셨다. 가정용 재봉틀은 손바느질을 좀더 기능적으로 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앉아서 손으로 돌리거나 발틀을 이용해 바느질을 하는 재봉틀은 나의 유년시절, 어머니의 애용품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돌리면 신기하게도 우리들 옷이 뚝딱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우리한테 무척이나 능력 있는 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 물건이 내게는 참 낯설고 조금은 두려운 대상이어서 영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재봉틀을 제대로 다뤄본 기억이 없다. 바늘에 실을 꿰는 순서나 북집에 밑실을 넣는 일, 그 사이로 천을 집어넣어 바느질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기계적인 작업이어서 늘 마음 밖으로 밀어내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정에서 기계의 힘을 발휘하던 손재봉틀은, 전기재봉틀과 언니들의 집단 재봉으로 인해 곧 사라졌다. 소위 기성품 의류가 등장하면서 집에서 재봉틀을 돌려 무엇을 만드는 일은 점점 드물어진 것이다.

연전에, 손바느질 하는 침선공예가의 전시회를 기획한 적이 있다. 손으로 한땀 한땀 바느질하거나 손재봉틀로 박아서 만든 조각보며 이불보 등을 전시했는데 둘러보는 이들마다 작품의 수고로움에는 감탄했지만 판매가격을 보고는 매우 놀라는 것이었다. 대량생산에 의해 만들어지는 제품 가격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차이 났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손바느질로 생활용품을 만든다는 것은 상품적 가치가 없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덕에 맞지 않는 작업이다. 우리 어머니들의 손바느질은 이제 공방이나 박물관 같은 곳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튿어진 옷자락을 재봉으로 드르륵 박아주거나, 옷을 줄이고 늘이는 것은 일도 아니게 해내시던 어머니 세대, 이에 반해 나는 새옷을 사서 바짓단 하나 줄이려 해도 수선점이나 동네 세탁소 신세를 져야한다. 어쩌다 하는 바늘잡이도 서툴기만 하다. 이런 우리네 삶이 정말 좋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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