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 Story in Asia] ‘호랑이연고’엔 호랑이 기름이 들어 있을까?
‘빨간약’이라 불리던 상처치료제와 함께 가정마다 상비약으로 하나쯤 갖고 있던 일명 ‘호랑이연고(Tiger Balm)’. 지금은 호랑이연고 자체보다 ‘화장품계의 호랑이연고’니 ‘피부트러블의 호랑이연고’ 하는 식으로 특효제품이란 의미의 보통명사가 돼 버렸다.
그 옛날 약장수는 ‘백두산 호랑이뼈를 통째로 갈아 넣은’ 이 약을 이곳저곳 아픈 데다 바르기만 하면 낫는다는 ‘만병통치약’으로 소개하곤 했다. 하얀색 반투명으로 ‘화~’한 느낌의 연고. 한동안 중화권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선물로 꼭 챙기는 품목이었다. 과연 호랑이연고에는 호랑이뼈, 아니 호랑이기름이라도 들어 있을까?
‘호랑이’는 후계자 이름에서 딴 것
호랑이연고는 19세기 말 중국 황제 직속 궁중 한의사 후쯔친(胡子欽)이 피부에 바르는 치료제로 쓰기 위해 약제들을 구성한 데서 비롯됐다. 1870년대 동남아시아 시장을 찾아 중국을 떠난 후쯔친은 미얀마 랑군에서 영안당(永安堂)이라는 작은 약국을 냈는데, 이곳에서 자신이 만든 약제를 팔았다. 그 약제가 바로 ‘만금유(萬金油)’. 열대계절풍 기후로 덥고 습한데다 모기와 해충이 많은 곳에서 꼭 필요한 피부치료제였다. 이것이 훗날 ‘만병통치약 호표 고약’으로 불리게 된 치료제의 원조였다.
1909년 후쯔친이 사망한 뒤 두 아들인 후원후(胡文虎)와 후원바오(胡文豹)가 영안당 약국을 물려받았다. 원후(文虎)와 원바오(文豹)는 각각 ‘온화한 호랑이’와 ‘온화한 표범’이란 뜻인데, 둘은 자신의 이름 뒷글자를 하나씩 따서 ‘호표행(虎豹行)’이라는 제약회사를 만든다. 이어 싱가포르에 공장을 세우고 중국과 동남아 각지에 공장을 세워 그들의 특별한 연고인 만금유를 대량 생산하게 된다.
만금유는 말레이, 홍콩, 바타비아(현 자카르타), 시암(현 태국)을 비롯한 중국 여러 도시에서 엄청나게 팔렸고,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 의약품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후원후는 이후 연고 이름을 ‘타이거 밤(호랑이연고)’으로 바꿨다. ‘타이거 밤’의 제조사는 싱가포르의 호파(Haw Par). 호랑이연고의 ‘호랑이’는 바로 이 연고를 만든 한의사의 아들 이름에서 딴 것이었다.
‘타이거 밤’ 브랜드의 주인공인 후원후는 동남아 화상(華商)의 거물로 군림하다 1954년 사망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에는 타이거 밤을 알리기 위해 조성된 ‘타이거 밤 가든’이 있다. 중국문화 관련 모형이 1000개 이상 전시돼 있는 이 가든은 제조사 이름을 따서 ‘호파(Haw Par) 빌라’로도 불린다.
지난 100년간 100개국 이상에서 판매된 타이거 밤. 지금은 6개 나라에서 생산돼 70여개국에 판매되고 있다. 세기를 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이 ‘호랑이 연고’는 과연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허브약제가 주성분… 벌레 쫓는 효과도
주요성분은 캄파, 멘톨, 박하유, 정향유, 카주풋유, 클로브유 등이다. 부딪혀서 생긴 타박상이나 어깨 결림, 류머티즘 통증 등이 있을 때 해당부위에 펴 발라주면 파스처럼 진통과 수렴, 소염작용을 한다. 박하향 등이 아로마테라피(향기치료) 역할을 하는데, 벌레 물린 데 발라도 가려움증이 완화된다.
머리가 아프거나 한여름 너무 더워 맥이 빠질 때도 관자놀이나 혈자리에 발라주면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이 약은 ‘청량유(淸凉油)’라고도 부른다. 열을 내리고 시원하게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허브향은 모기나 해충이 싫어하기 때문에 벌레를 쫓는 데도 사용된다. 호랑이가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연고의 원료성분이 되는 풀에 몸을 비빈다는 말도 있는데, 이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다. 카주풋유 같은 경우 고대 인도에서부터 전통 민간 치료제로 널리 사용돼 온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상처에 직접 바르는 것은 금물. 피부연고제라고 해서 호랑이가 풀에 몸을 비비듯 온갖 피부병에 남용하거나 과도하게 바르면 독성을 나타내거나 접촉성 피부염으로 악화될 수 있다. 약의 효능은 성분함량과 배합이 관건이지만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달린 것이다.
호랑이연고의 기본은 하얀색, 그리고 조금 더 강한 효과를 내는 빨간색의 크림이 있었지만 요즘엔 차갑거나 따뜻하게 붙이는 파스, 패치, 로션, 젤, 스프레이, 모기퇴치제 등 다양한 형태로도 생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0년대 초 시판됐다가 10여 년 전 국내 유통이 중단됐는데, 2년 전 태전약품에서 다시 정식으로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 육각형 모양의 디자인이 고전적인 향수에 젖게 만들지만 명성만큼이나 모조품도 많다. 포장의 색깔과 특징이며, 브랜드 위의 호랑이 앞발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조년월일이 써있는 날짜, 연고가 들어 있는 양 등 정품과 모조품의 구분방법은 이제 네티즌들의 관심사다.
한가지 더. 만금유는 원래 ‘할 줄 아는 것은 많지만 어느 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을 빗댄 말이다. 호랑이연고 역시 여기저기 두루두루 쓰일 수 있지만 큰 병이 났을 땐 역시 병원을 가는 게 맞지 않을까. 만병통치약이란 질환과 약이 제대로 맞았을 때의 감탄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