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국민건강 지킴이’ 된 군사과학기술 ‘헤파필터’

                                                       헤파필터

지난 해 여름 원자탄 개발과정을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되었다. 원자탄은 지난 1백여 년 동안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게임체인저(Game Changer) 가운데 단연 최고로 손꼽힌다.

한편 이 영화의 배경인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원자탄 외에 수많은 군사혁신이 적용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헤파필터(HEPA Filter, High Efficiency Particulate Air Filter)’이다. 사실 헤파필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화학 및 생물무기 공격으로부터 전투원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되었다. 이때 개발된 헤파필터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원자 폭발에 따른 해로운 물질을 걸러내는데 사용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 헤파필터 기술은 스핀오프(Spin-off, 군사기술의 민간 이전)가 이루어진다. 첫 민간적용은 美 원자력위원회(AEC, Atomic Energy Commission)가 모든 핵 시설의 배기장치에서 토출되는 해로운 입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AEC는 널리 알려진 美 에너지규제위원회(NRC, Nuclear Regulatory Commission)와 美 에너지연구개발국(ERDA, Energy Reseach and Development Administration)의 전신이다.

오늘날 헤파필터는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고 있다. 공기청정기, 진공청소기, 마스크, 항공기, 자동차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 작지만 강한 군사과학기술이 집집마다 설치되고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전열교환기’이다.

항공기 헤파필터.  코로나 기간인 2020년 7월 대한항공이 안전한 기내 환경을 만들기 위한 항공기 기내 공기순환 시스템을 점검하면서 헤파필터를 교체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과 함께하는 헤파필터

전열교환기는 바깥의 공기를 기계장치로 흡입하여 나쁜 물질을 제거하여 실내에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장치이다. 전열교환기에는 프리필터(Pre-filter)와 헤파필터가 있다. 통상 건축물 외부에서 들어오는 바깥 공기의 큰 입자는 프리필터에서 먼저 걸러진다. 다음으로 헤파필터가 방사성 물질에서부터 미생물까지 각종 미세물질을 걸러낸다. 이론상 헤파필터는 0.3미크론 크기의 먼지, 꽃가루, 박테리아 등을 99.7%까지 차단할 수 있다.

전열교환기를 이루는 구성요소 가운데 전열교환소자가 있다. 전열교환소자는 여러 겹의 골판지를 방향이 엇갈리게 겹겹이 쌓아올린 육면체다. 골판지 구멍으로 외부에서 유입되는 공기와 내부에서 배출되는 공기가 지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골판지의 종이 막을 통해 따뜻한 공기는 차가운 공기에 열을 전달한다.

이 원리를 통해 겨울철 외부의 차가운 공기가 골판지를 통과하면서 내부에서 배출되는 따뜻한 공기의 열을 전달받아 데워진 상태에서 실내로 유입된다. 반대로 여름철 외부의 더운 공기는 골판지를 통과하면서 내부에서 배출되는 실내의 시원한 공기에 열을 잃게 된다. 이를 통해 실내에 덥지 않은 공기가 유입되어 냉방부하를 줄이게 된다. 환기시스템이 아닌 전열교환기로 불리는 이유이다.

전열교환기에는 실외의 오염된 공기가 유입되는 지점에는 프리필터와 헤파필터가 모두 설치된다. 반대로, 실내에서 생활 등을 통해 오염된 공기는 흡입되어 프리필터만을 거쳐 실외로 배출된다.

미세먼지, 새집증후군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 전까지 환기는 창문개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자연환기는 냉난방 효율을 떨어뜨리며, 황사와 미세먼지 등 대기오염물질이 실내로 유입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공기청정기가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공기청정기 또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며, 때에 따라서는 이산화탄소 중독까지 일으킬 우려가 있다. 아울러, 공기청정기는 실내에서 발생하는 포름알데히드, 라돈, 냄새, 유기화합물을 제거하거나, 적정의 산소 농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창문을 통한 자연환기가 여전히 필요하다.

한편 창문을 통한 자연환기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전열교환기가 등장하게 된다. 2006년 이래로 ‘공동주택 환기설비 의무 적용’에 따라 1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에서는 전열교환기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최근에는 단독주택에서도 전열교환기 설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이처럼 전열교환기 설치가 확산되면서 군사과학기술인 헤파필터가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하이엔드 건축으로 다시 태어나는 헤파필터

최근 전열교환기가 하이엔드 건축의 핵심설비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열교환기에 공기순환 기능 외에 음압가동 기능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평상시에는 건축물에서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감염자 발생 등 비상시에는 건축물 내부의 지정된 공간을 감염병 예방과 확산 방지를 위한 음압격실로 활용토록 음압을 형성시킨다.

양압은 친숙한 용어이다. 실내의 공기압을 실외보다 높여 외부의 공기가 실내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한다. 대부분 군사시설은 화학전에 대비하여 양압 기능을 갖추고 있다. 반대로 음압은 실내의 공기압을 실외보다 낮추어 실내의 공기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한다. 감염병 격리병동에서 음압기능은 필수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확진된 환자의 전파 감염경로를 분석한 결과, 확진자 가족에 의한 2차 감염이 40.3%로 조사되었다. 특히 오미크론 우세 시기에는 선행 확진자 103,050명의 가족 209,682명 가운데 72,609명이 추가로 감염되었다. 이는 델타 변이 바이러스 유행 기간 감염률에 비해 약 1.3배 높은 수치이다. 당시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의료기관 및 공공시설을 통한 격리는 한계에 봉착한다. 이에 정부가 방역 정책을 자가격리로 선회하면서 가족 간 2차 감염이 폭증한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겪자 기존 전열교환기에 자가격리에 필요한 음압가동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외에도 사스, 메르스 등 중증 호흡기 질환으로 인해 적지 않은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을 보았다.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인해 북극의 바다 얼음이 녹으면서 바다 동물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가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수많은 병원체의 창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공동주택을 포함한 하이앤드(가격을 고려하지 않는 고품격) 건축물에 음압기능을 가진 전열교환기가 인기리에 설치되고 있다. 서초동 트라움하우스가 방공호 설치만으로 최고가에 매매가 이루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실내에 음압공간을 만들기 위한 전열교환기 설치는 하이엔드 건축에서 전혀 이상한 바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 전열교환기 대비 설치비용이 그리 비싼 것도 아니다. 프리미엄 공동주택 브랜드를 가진 건설사들이 앞다투어 음압기능을 가진 전열교환기를 찾고 있는 이유이다.

온 국민이 함께 누리는 음압기능을 갖춘 전열교환기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지만, 같이 맞게 될 재난 앞에서 생사의 여부가 돈에 의해서 갈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본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거의 지진을 경험할 수 없다. 설사 지진이 발생하더라도 그 피해가 일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한반도가 지진에 안전하지 않다는 학계의 주장에 따라 우리나라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내진성능을 일정 수준 이상의 건축물에 적용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한반도에서 지진에 의한 피해보다 팬데믹(혹은 감염병)에 의한 피해가 규모나 빈도수 측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생물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북한은 평안북도 정주에 ‘미생물연구소’를 두어 생물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지금은 평안남도 성천 소재의 ‘세균연구소’를 포함하여 약 17개의 연구 및 생산, 저장시설에 약 13종의 생물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생물무기의 위협이 우리의 코앞에 있지만, 실상은 주변에 생물무기에 보호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

하이엔드 건축물에서 시작된 음압기능을 갖춘 전열교환기가 일반 건축물에도 확산되면 좋겠다. 가벼운 감기에서부터 독감, 팬데믹, 나아가 생물무기 앞에서도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줄 것이다. 정부 차원의 보조금이 지원되면 더할 바 없겠다. 건강보험공단에서 국민건강검진에 비용을 지급함으로써 의료비용 부담을 낮춘 효과를 알고 있다. 재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비용을 고려할 때, 음압기능을 갖춘 전열기 설치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그리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軍 생활관, 학교, 교도소 등 기능유지가 필수적인 집단시설에서는 음압기능을 갖춘 전열교환기의 의무적 설치를 제안한다. 큰 비용이 추가되지 않아 충분히 구현이 가능한 정책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에 벧엘(Beth-el)社가 있다. 이 회사가 개발하여 생산하는 헤파필터가 유럽 HVAC(Heating, Ventilation, and Air Conditioning, 난방, 환기, 냉방)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다. 의료 및 보건 선진국이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생물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개발한 K-전열교환기가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날 또한 기대해 본다.

“다 죽어 가는 전염병 환자를 보고 나면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도 자기 신세를 장자(長子)보다 낫게 생각하게 마련이다.”(병막 구경이 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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