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난중일기] 글로벌 포함(砲艦)시대를 준비하자

1871년(고종 3년)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길의 초입인 강화도에서 어재연 장군이 이끈 조선 육군은 美 해군 육전대와 해병대를 상대로 완패를 당한다. 미군에게는 본토를 벗어나 처음 치른 역사적 전투이자, 첫 명예훈장이 수훈되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한편,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강경하게 외세와 단절한다. 이 사건이 구한말 쇄국정책의 상징인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 조선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이미지는 신미양요

제국주의가 막 태동하던 무렵 일본은 미국 포함(砲艦)외교의 첫 먹잇감이 된다. 이 시기 일본 열도는 양이론(攘夷論)과 개국론(開國論)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끈 순양함 4척, 그리고 이듬해 순양함 9척 앞에 속절없이 무릎 꿇고 개항을 당한다. 이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한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다. 오늘날 일본은 당시의 개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가슴 아프게도 일본 제국주의의 첫 사냥감은 조선이었다. 1875년(고종 7년) 일제가 운양호(雲揚號, 일어 발음 운요호)를 앞세워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기 전 조선 또한 이미 한 차례의 포함외교를 경험한다. 1871년(고종 3년) 한양으로 들어가는 물길의 초입인 강화도에서 어재연 장군이 이끈 조선 육군은 美 해군 육전대와 해병대를 상대로 완패를 당한다.

미군에게는 본토를 벗어나 처음 치른 역사적 전투이자, 첫 명예훈장이 수훈되는 뜻깊은 사건이었다. 한편, 처참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강경하게 외세와 단절한다. 이 사건이 구한말 쇄국정책의 상징인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 조선의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국기(國旗)가 없던 조선에서는 최고 지휘관이 사용했던 수자기(帥字旗)가 이를 대신했다. 임진왜란을 나타낸 여러 그림에서 ‘수(帥)’자 적힌 커다란 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현재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남아있다. (이마저도 미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탓에 우리나라에 없다.) 신미양요는 수자기를 뺏길 정도의 일방적 전투였다. 수백 명의 조선 군사가 전사했지만, 미군 사상자는 고작 3명이었다. 한 시간 내에 끝난 전투이기에 일종의 학살이었던 셈이다. 열세한 무기체계 탓에 조선 군사들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탓이다.

왜 이렇게 조선의 무기체계가 이토록 형편없던 것이었을까? 사실 조선은 포함(砲艦)에서 아시아 맹주였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서 사용된 각종 총통과 함께 화차, 비격진천뢰 등만 보더라도 조선의 포(砲) 기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함(艦)에서는 명나라와 왜에 비할 수 없는 뛰어난 수준의 판옥선을 보유하였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에 우수한 군사과학기술이 크게 이바지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명종실록>에는 조선이 판옥선을 제작한 이유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깃배와 같은 평선(平船)을 타고 오던 왜구가 상장(上粧, 선체 상층에 설치한 갑판)을 갖춘 근대식 옥선(屋船)을 타고 온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조선은 측면 방패판과 함께 상장을 설치하는 판옥 구조를 개발한 것이다. 여기에 전투원과 노를 젓는 격군(格軍)을 분리해 효율적인 임무수행이 가능토록 공간을 별도로 구성하였다. 이는 당파(撞破, 함포로 적선을 파괴) 전술을 주로 구사하는 조선의 자랑인 화포 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판옥선은 화포 적재 및 이동에 따른 균형, 화포 발사에 따른 내충격성, 화포 재장전을 위한 제자리 선회 등 당시 명나라, 왜 등이 넘볼 수 없는 최신예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학익진 등 널리 알려진 전술은 이러한 군사과학기술 덕분에 가능했다.

한편, 붕당정치의 폐단에 따른 내부분열로 인해 조선의 군사과학기술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숭문억무(崇文抑武) 기조 하에 문인이 지휘관, 무인이 부지휘관 임무를 수행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세월이 흘러 신미양요에서는 죽는 순간 바닥에 있는 모래까지 집어 던지며 결사항전 했을 선조들을 떠올리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포함전투의 맹주였던 조선이 포함외교에 무릎을 꿇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훗날 러일전쟁에서 쓰시마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수군을 벤치마킹한다.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기 전에 쓰시마 섬 근해에서 학익진의 응용된 형태인 정자(丁字) 전술을 구사하여 완승을 거둔다. 이 전술은 종대로 진입하는 적(適) 함대에 맞서 횡대로 아(我) 함대를 펼쳐서 포 사격을 가하는 것이다. 판옥선이 제자리 선회하며 포를 재장전한 것과 달리 일본 해군은 함대 전체가 반시계 방향으로 크게 돌면서 재장전한 것만 다를 뿐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받아들인 서양의 선진 군사과학기술과 임진왜란에서 맛본 조선 수군의 전술을 발판 삼아 인류 최대의 해전사 가운데 하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조선과 일본은 유사한 혹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들을 공유했지만,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포함외교 이후 일본은 근대화로, 조선은 쇄국으로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임진왜란에서 두 나라는 서로 맞붙었지만, 조선은 군사체계가 무너졌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북아 최강자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딛고 오늘날 우리나라 무기체계가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한때 동북아를 호령하는 함포 전성시대가 다시 찾아온 것은 아닌지 자못 기대가 된다.

K2 전차, K9 자주포에 이어 천무, 천마, 현무, 현궁, 천궁, 신궁, 비호, 해성, 청상어, 홍상어 등을 떠올리면 우리가 그 옛날 강력한 화포 체계를 갖춘 선조들의 후예임이 틀림없는 듯하다. 특히,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사일 사거리 지침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새롭게 펼쳐질 국제질서 속에서 군함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세계 조선 수주의 4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미국의 수상함뿐만 아니라 캐나다 잠수함까지 건조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특히 전 세계 수요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미 해군 함정의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 유지, 보수, 운영) 시장 선점도 가시권 내에 들어와 있다. 그야말로 K-조선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최신예 전함 기술로 동북아를 호령한 우리 선조들의 DNA가 다시 꿈틀대고 있다.

여기저기서 우리나라가 국운 상승의 초입에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접한다. 우리 기업들의 약진과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바라보면 허무맹랑한 예측은 아닌 듯하다. 역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이어보고, 이를 토대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 점에서 지난 역사를 오늘의 포함시장과 연결지어 본다.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가 세계 포함시장을 주름잡는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Edward Hallett Carr)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