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DMZ 생태공원’ 통일 여는 열쇠…”민간 주도, 정부 지원으로”

<사진=박영준>

필자가 육사에서 근무할 때다. 하루는 전방부대 모 연대장이 연락을 주었다. GP(Guard Post, 경계초소)의 기초부가 불안정하여 다급히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부터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 출입 승인을 어렵지 않게 받았다. 민간 기술자의 DMZ 출입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탓에 DMZ 안에서의 시설, 재해 관련 기술자문을 도맡고 있었다.

훗날 잦은 DMZ 출입을 돌이켜보니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GP 앞에 펼쳐진 초원을 바라보면서 에덴동산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습지, 평야, 산지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달랐다. 서부지역, 중서부 내륙지역, 그리고 중동부 산악지역은 곳곳에 보석과 같은 절경이 가득했다.

DMZ의 가을 풍경<사진=박영준>

통상 TV에 자주 등장하는 철책선, 즉 남방한계선은 GOP(General Out Post, 일반전초) 부대가 담당한다. 남방한계선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군사분계선에서 규정상 2km 남쪽에 떨어져 있다. GP는 군사분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 즉 DMZ에 자리 잡고 있다. 

민간인들은 남방한계선에서 5∼15km 남쪽에 떨어진 민간인통제선까지만 갈 수 있다. 민북지역, 즉 민간인통제선에서 남방한계선까지는 관할 군부대로부터 허가된 사람만 출입이 가능하다.    

 DMZ 둘레길 두타연의 주인 잃은 철모 <사진 박영준>

한편, 남방한계선을 넘어 DMZ 출입은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승인이 필요하다. 이 지역으로 민간인이 출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출입하더라도 승인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출입이 어려운 민북지역만 해도 미지의 세계로 보이니, 출입이 거의 불가능한 DMZ는 신비의 세계로 보일 만도 하다. 이런 DMZ 방문은 필자를 포함한 극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던 행복이었다.    

어느 날 한국관광공사에서 ‘DMZ 평화의 길’ 구축을 위한 연구를 의뢰해 왔다. 마음껏 접경지역을 누빌 기회가 온 것이다. 한강 하구에 펼쳐진 드넓은 갯벌, 한탄강 유역에 우뚝 솟은 주상절리, 금강산 가는 길에 있는 두타연 등 수많은 절경을 두발로 찾아가 속속들이 볼 수 있었다. 마음 한편에는 필자가 본 것을 함께 나누고픈 마음 또한 간절했다.

산양 DMZ 둘레길 두타연의 야생동물 <사진 박영준>

‘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 독일 통일과 함께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경계지역에 다시 태어난 유럽 최대의 생태보전지역이다. 우선 최북단 발트해에서 시작하여 최남단 체코 국경까지 이어진 철조망이 걷어졌다. 다음으로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여기저기 매설된 지뢰가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 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오가던 순찰로가 방문객들이 거니는 탐방로로 탈바꿈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동서독으로 양분되었다. 초기 두 지역 사이는 감시가 심하지 않았고, 변변한 경계선 표시조차 없었다. 시간이 흘러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이를 막기 위해 동독이 베를린에는 ‘베를린 장벽’을, 베를린 이외 지역에는 ‘철의 장막’을 설치했다.

철의 장막은 3,000km 철조망, 800여 개의 감시탑, 100만 여발의 대인지뢰, 그리고 셀 수 없는 도로대화구와 부비트랩으로 채워졌다. 이에 따라 점차 가족과 친구들은 갈라지면서 쉽게 만날 수 없게 되었다.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철의 장막 아래 자라는 녹색의 생명 씨를 발견한 이들이 있었다. 호스트 스턴(Horst Stern), 베른하르트 그르지멕(Bernhard Grizmek) 등 ‘지구의 벗’이라는 시민단체에 속한 환경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분트(Bund)를 설립하고, 가장 열정적인 바이에른 지부를 중심으로 죽음의 땅에서 자연적 특성, 생물종, 서식지 등에 대한 목록이 작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작이 그뤼네스 반트라는 이름으로 전국적 규모의 결의를 끌어낸 것이다.    

그뤼네스 반트는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변화시켜 극찬받은 사업이다. 한편 생태적 보전 이외에 살펴야 할 것은 이 사업이 독일 통일에 정부가 아닌 민간이 이바지한 대표적 사례라는 점이다. 통일 이후에도 분트 중심의 보전 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민간이 선도하는 사업에 정부 기관인 자연보전청(Bundesamt für Naturschutz)과 지자체가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한편, 2013년 7월 그뤼네스 반트 사업을 이끈 분트의 담당국장이 내한했다. 내한 인사는 우리나라 정부가 DMZ 사업에 앞장설 때 시민단체가 함께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시민단체의 답변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질문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이산가족, 국군포로, 실향 등 주로 인륜적 측면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해 왔다. 하지만, 이제 통일은 미래세대를 위한 번영의 터전으로 생각을 옮길 필요가 있다.

<사진=박영준>

분단 70여년을 지나오면서 우리나라는 최빈국에서 세계적 군사‧경제 대국으로 우뚝 섰다.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에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이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제는 통일을 위한 준비도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우리나라 DMZ에는 그뤼네스 반트 이상으로 천혜의 자연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다. 강화에서 고성까지 이어진 길이 248km의 생태 띠에는 반달가슴곰, 사향노루, 산양, 삵, 담비, 하늘다람쥐 등이 마음껏 뛰어다니고 있다. 겨울에는 두루미가, 여름에는 저어새가 DMZ를 찾는다. 멸종 위기에 있는 야생 동식물만 101종에 달한다.

원시림에 가까운 향로봉 일대, 우리나라 유일의 용늪이 있는 대암산 정상부,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한탄강의 주상절리, 끝없이 이어진 추가령구조곡, 드넓게 펼쳐진 철원평야, 한강과 임진강의 자연하구 등이 만드는 동서 생태축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또 하나의 생태축인 백두대간과 교차한다.

시민단체가 환경운동에 대한 새로운 장(章)을 써 내려갈 때가 왔다. 정부를 견제하거나, 정부에 협조하는 차원을 넘어 이제는 정부를 이끌어 가는 새로운 환경운동을 펼칠 때가 왔다. 그 대상이 DMZ 생태공원이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DMZ 생태공원, 통일 한반도를 이루는 큰 힘이 되길 소망해 본다.

“경계는 분리하고, 자연은 연결한다.”(Grenzen Trennen, Natur Verbin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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