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사업에 선봉을
先勝求戰(선승구전) 雖死不敗(수사불패). 군인은 승패를 떠나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다.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 중인 ‘고려거란전쟁’에서 보인 양규 장군의 전사가 그러하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도 다시는 거란이 고려 땅을 밟지 못하도록 싸운다.
김한민 감독의 영화 <노량>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다시는 왜군이 조선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끝까지 싸우다 운명한다. 한편, 이 두 장군은 나라를 위해 죽음을 불사한 용장이면서 동시에 선승구전을 구사하는 지장이다.
양규 장군은 치밀한 전황분석과 완벽한 작전계획으로 연전연승을 이어간다. 거란군을 잡기 위해 덫을 놓고, 덫에 걸린 거란군에게는 양규 장군이 쏜 효시와 함께 고려군의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진다. 드라마 최고의 백미이다. 이순신 장군은 천문과 지리를 살피고, 판옥선, 거북선, 총통(화포) 등을 앞세운 당파 및 함포전술로 적을 압도한다. 열두 척 함선으로 열 배가 넘는 적선을 격파한 명량해전은 최고의 해전사로 기록되고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 명대사다.
‘무식한’ 군사정권이라고 깎아내리는 이들이 많다. 군사정권의 어두운 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집단이 軍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고,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북방외교를 이끌어냈다.
승리할 준비를 해두고 전투에 임하니 죽을 수는 있으나 패배는 없다는 선승구전의 군인정신이 총성 없는 전쟁인 외교에서 유감없이 발휘된 덕이다. 그에 반해 작년 8월 전라북도 새만금 일원에서 열린 잼버리대회는 그 결과가 참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 ‘파이어 축제(Fire Festival)’라는 오명과 함께 잼버리 100년 역사상 최악이라는 혹평까지 받았다.
같은 해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박람회기구 총회가 열린다. 부산 엑스포 유치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적표가 나왔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119표를 쓸어 담은 반면, 부산은 29표에 그친 것이다. 서울올림픽 개최와 북방외교 전성기 때와는 비할 수 없는 국력과 세계적 영향력을 가지고서도 수위는커녕 바닥의 결과를 얻은 것이다.
1988년 열 엿새 동안 진행된 서울올림픽은 부산 엑스포 유치 불발과 새만금 잼버리 진행 파행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나라의 서울올림픽 유치 결의는 1979년에 이루어진 후, 1981년 9월 18일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현대 정주영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가 독일 바덴바덴으로 날아갔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 비밀투표에서 우리나라 서울이 52대 27의 압승을 거두며 일본 나고야를 누른다. 멕시코를 제외하면 선진국 전유물인 올림픽을 개발도상국이 유치한 쾌거였다. 유치보다 더 큰 감동은 진행이었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기치 아래 160개국 13,626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모스크바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두 차례 반쪽짜리 올림픽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냉전의 대리전쟁이 있었던 한반도의 서울에서 스포츠를 통해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인류의 영원한 진전을 약속한 축제가 되었다.
전야제, 성화 봉송, 개회식, 폐회식, 경기장, 선수촌, 방송센터, 전산센터, 안전대책, 교통 및 숙박, 위생 및 방역, 자원봉사요원, 관광 및 기념품, 전시회, 음악회, 올림픽공원 등 여러 면에서 역대 세계대회에 손색없는 모범사례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성과는 올림픽 이후에도 이어진다. 같은 해 노태우 대통령은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UN 총회에서 연설한다. 이듬해 동유럽 국가인 헝가리를 효시로 북방외교의 낭보가 이어진다.
외교가에서는 동유럽 몰락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가 서울올림픽이었다고 한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은 소련 지배하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에 충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러한 성과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방무관들이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동유럽 국가는 우리에게 적진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들 국가와의 활동에는 목숨을 거는 각오를 해야 했다.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치밀한 준비와 완벽한 전략, 즉 선승구전의 군인정신으로 동유럽 국가를 오가며 북방외교의 물꼬를 튼 것이다.
지구촌 여기저기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분쟁 이후에는 재건사업이 뒤따른다. 복구소요가 많은 곳은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은 중요한 지역이며, 중요한 지역에 당연히 사회기반시설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달리 표현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된 지역에서는 재건사업에서 남는 장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편, 장기간 대규모 사업비가 불가피한 건설업 특성상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 따라서 사업성이 높은 위험한 지역에서의 복병은 리스크에 따른 금융부담이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이라크 재건사업을 위해 우리나라는 2003년 주이라크 대사관을 열고, 이듬해 자이툰부대를 파병했다. 현대건설을 비롯한 여러 기업이 현지조사단을 파견하여 수주전에 나섰다. 이러한 민관 협력의 성과로 현대건설이 첫 수주 낭보를 보내왔다.
하지만, 이라크 내 종파 갈등 등에 따른 내부 사회 불안이 지속되면서 추가적인 수주활동이 어려워졌다. 심지어 현대건설이 쌍용건설과 함께 이라크 북부 쿠르드 자치지역에서 약 10조원 규모의 개발사업을 수주했지만, 금융조달 실패로 무산되기도 했다. 한화건설은 비스마야 신도시 개발사업에서 아직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안정된 곳은 사업성이 낮고, 위험한 곳은 리스크가 커서 금융조달이 쉽지 않다. 이러한 경험을 한 건설업계에서는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을 새로운 기회로 보면서도 섣불리 장밋빛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국가들은 재건사업에 자국軍을 반드시 대동한다. 재건소요가 많은 곳, 즉 사업성이 큰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에 먼저 자국의 기업을 보낸다. 동시에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국군을 파병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후 재건사업에서 기대 이상의 사업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는 안정화작전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했으니, 이러한 민군협력 모델은 더 이상 한 번의 시도가 아닌 교리로 발전한 완성된 모델이 되었다.
우리는 이라크 재건사업을 반면교사 삼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 우리나라 기업만 보내는 우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댐 보강, 국제공항 확장 등에서부터 원전사업, 스마트시티 구축 등 여러 면에서의 요청이 우리나라에 쇄도하고 있다. 아마도 전후 복구에 대한 DNA를 가진, 그리고 비약적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만큼 좋은 본보기가 없기 때문 않을까?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은 향후 10년간 건축, 토목, 플랜트사업 등에서 약 1,200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IBK투자증권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가운데 우리나라는 약 5.5%인 66조원 가량의 일감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건설업에서 자금조달은 사업성이 크고 리스크가 낮을수록 수월하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이다.
이에 우리 정부도 공적개발원조와 대외경제협력기금 등을 증액하고, 동시에 집행절차를 간소화시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편, 우리가 놓치는 것, 즉 우리도 서구 국가들처럼 지금부터라도 국군 파병을 위한 비준을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이해관계에 있는 국가들과의 군사협력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지난날 서울올림픽과 북방외교에서 국방외교가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 재건사업에도 우리의 국방외교가 선봉에 서줄 것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