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난중일기] 이순신 첫 수군 임지 발포진에서 한국의 미래를 보다
전남 고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순천역에서도 차량으로 한 시간 남짓 더 들어간다. 황금빛 유자가 탐스럽게 열리는 시골이다. 여기저기 솟아난 돌섬을 품은 바다의 잔잔함이 운치를 더한다. 바다를 메운 평원에서는 우리나라 우주항공의 미래가 꿈틀대고 있다.
고흥은 호국의 고장이다. 수많은 장수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이순신이 수군(水軍)을 지휘한 첫 임지여서 그 의미가 더해진다. 고흥은 조선시대에는 ‘흥양’으로 불리었다. 전라좌수군이 관할한 5관 5포의 절반인 1관(흥양현)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가 고흥에 있었다. 고흥이 조선 수군에게는 요충지였던 셈이다.
이순신의 첫 수군 임지는 발포진이다. 발포항을 내려다보는 뒷산에 만호(대대장급 지휘관) 이순신이 복무하던 발포만호성 흔적이 남아있다. 교과서에 나오던 오동나무 사건의 배경이 된 곳이다. 당시 전라좌수사(사단장급 지휘관)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만호성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올 것을 지시한다. 이에 이순신은 오동나무가 나라의 재산이기에 단호히 거부한다.
이 외에도 이순신은 훈련원 시절 서익의 사사로운 요구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하는 등 청렴함과 강직함으로 군무를 이어간다. 이러한 돌직구들로 인해 세계적 명장의 삶은 탄탄대로라기보다는 두 차례 백의종군과 세 차례 파직에서 보듯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두번째 백의종군을 피할 수 있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제해권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전쟁이 빨리 끝나고, 조선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북아 중심은 물론이거니와 서구 근대산업국가로의 전환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의 돌직구에 대한 아쉬움을 감추기 힘든 이유이다. 직선은 곡선에 비해 시간 면에서 효율적이고 결과 면에서 효과적이다. 하지만, 더 큰 틀에서 부드러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전략적 유연성, 곧 지혜를 구하는 것이 비록 어렵지만 함께 누릴 수 있는 더 나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혁명에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는 공포정치로 널리 알려진 급진 지도자이다. 혁명 이후 사회적 안정을 되찾고자 노력하였으나 뜻밖에 암초를 만난다.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여 민심이 흉흉해진 것이다. 이에 물가 안정의 일환으로 우윳값 인하를 강제로 단행한다. 즉, “모든 프랑스 어린이들은 값싼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라는 선의와 함께 우윳값을 절반까지 낮춘 것이다.
이내 낮은 우윳값을 견디지 못한 낙농업자들이 젖소를 내다 팔기 시작했다. 반토막 난 가격으로는 젖소를 먹일 건초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로베스피에로는 건초업자들에게 건초가격 인하를 강요한다. 우유 공급의 차질이 비싼 건초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건초업자들은 건초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보았기에 남은 건초들을 모두 불태운다.
결과적으로 대다수가 즐기던 우유는 가격이 열 배까지 폭등하며 부르주아들만의 전유물이 되고 만다. 선의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 의대정원 확대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의사 수 확대가 필요한 것은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지지하는 듯하다. 다만 해결책에서 돌직구보다 곡선미가 묻은 유연함이 목적을 달성함에 더 낫지 않았을지 생각해본다.
발포만호성 자락에 서서 멀리 발포항을 바라본다. 선의가 빛바래지 않고 최선으로 기억되려면 직선만이 해결책은 아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샘을 찾는 것만큼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샘을 찾는 노력이 있기에 사막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겨져있기 때문이다.” <생텍쥐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