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윤대통령 사관학교 졸업식보다 입학식 참석을
“나는 조국의 군복을 입은 채 골짜기 풀숲에 유쾌히 쉬노라. 이제 나는 잠시 피곤한 몸을 쉬이고 저 하늘에 나는 바람을 마시게 되었노라. 나는 자랑스런 내 어머니 조국을 위해 싸웠고 내 조국을 위해 또한 영광스레 숨지었나니 여기 내 몸 누운 곳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밤이슬 나리는 풀숲에 나는 아무도 모르게 우는 나이팅게일의 영원한 짝이 되었노라.”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나는 광주(廣州) 산곡(山谷)을 헤매다가 문득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만났다’의 한 대목이다. 군인을 존중하는 사회, 꿈에서만 가능할까? 선진국은 왜 군인을 존중하는 걸까?
군인이 존중받는 사회 롤모델 미국
텍사스 남부에는 미국에서 아홉 번째 큰 도시인 ‘샌 안토니오(San Antonio)’가 있다. ‘리버 워크(River Walk)’가 멕시칸 낭만과 함께 흐르며, 美 독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알라모 격전지가 있어 남다른 애국심이 도시 곳곳에 녹아있다.
이 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군인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이다. 군인신분증만으로 음식점을 포함한 많은 상점에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최고의 멤버십카드인 셈이다.
범고래 쇼로 널리 알려진 ‘씨 월드(Sea World)’라는 놀이공원이 있다. 매 공연에 앞서 군복을 입고 있거나 혹은 입었던 이들을 관람석에서 일으켜 세운다. 군인의 헌신에 관한 가슴 뭉클한 영상이 끝나면 온 관중이 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낸다. 주목할 점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군인들을 예우해 주는 것이다.
인기 스포츠인 풋볼과 야구, 카레이스 등에서도 제복을 입은 군인이 곧잘 등장한다. 풋볼 경기장에서는 심판의 휘슬과 동시에 경기장 상공을 전투기, 헬기 등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통과한다. 전광판에는 막 하늘을 가로지른 조종사가 소개된다. 야구장에서 군인이 시구를 하는 것은 흔하디 흔한 장면이다. 카레이스에서 출발신호는 제복을 입은 군인들의 당연한 몫이다.
이 외에도 대부분의 항공사에서는 군인을 먼저 탑승토록 배려한다. 관공서, 은행 등에서 군인의 새치기는 당연한 권리일 정도다.
군 밖에서 이 정도이니 영내(營內)에서의 복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미 보병학교가 있는 포트 베닝(Ft. Benning)의 골프장 잔디는 인접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Augusta National Golf Club)에 준하는 수준이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은 그린재킷으로 유명한 마스터스 토너먼트가 개최되는 곳이다.
경기도 평택에는 캠프 험프리스가 자리잡고 있다. 부대 안에 있는 PX(Post Exchange, 영내 매점)가 대형 쇼핑몰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PX 규모가 상암월드컵경기장 수준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내 식당에 공급되는 쇠고기가 최고 등급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때 국내 모 우유업체에서 식품 위생 규정이 까다로운 미군에 납품한 것을 자랑스럽게 TV 광고에 활용했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졸업생 연봉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와 아나폴리스(Annapolis, 미 해군사관학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본토에서 직접 공수해 온 값비싼 아이스크림을 전장에서 싸우는 미군들에게 후식으로 제공한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다. 그들이 국가의 부름에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아이스크림 때문이 아니다. 최고를 보내줄 만큼 그들의 헌신에 대한 국가와 국민의 존중 덕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다음 세대들이 MIU(Men in Uniforms, 제복 입은 자)의 대표 격인 군인을 장래희망으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대한민국, 윗물부터 썩은 어두운 민낯
1999년 10월 29일. 고위 공직자의 병역이행 여부가 <관보>에 처음으로 게재된 날이다. 예상한 것이었지만, 참담한 결과 탓에 ‘유전면제(有錢免除), 무전입대(無錢入隊)’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로부터 4반 세기가 흘렀지만, 참담한 수준은 여전하다. 고위 공직자의 병역이행에 관한 조사 대상 4,070명 가운데 30% 이상이 현역 복무를 하지 않았다. 일반인에 비해서는 다소 낮은 수치이지만, 눈여겨볼 점은 면제 사유이다.
일반인의 면제가 저학력, 유죄판결, 생계곤란, 고아 등 불가항력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고위 공직자의 사유는 체중미달, 척추디스크, 안과질환, 정신지체 등 대부분 질환에 의한 것이었다. 의도적 병역 면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한술 더 떠 올해 3월에는 고위 공직자 혹은 공직 후보자의 병역면제 사유가 질병일 경우 이를 공개하지 않는 법안 개정이 추진되었다. 기존에는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질병 외에는 모든 사유를 밝혀야 했다.
하지만, 이번 법 개정을 통해 질병으로 인한 병역면제 사유는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전부 비공개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필이면 개정 법률의 핵심이 고위 공직자의 병역 면제 사유와 궤를 같이한 터라 비난 여론이 거셌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급간부 수급, 군인 존중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
최근 우리 군 초급간부의 낮은 처우가 많이 회자된다. 초급간부의 안정적 수급과 관련해 상당한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사실 초급간부의 열악한 근무 환경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쳐 간 많은 선배들은 진충보국의 칼끝에 서 있다는 명예와 자긍심으로 숱한 시간을 감내해 왔었다. 긴 복무기간, 낮은 봉급, 극한의 환경과 가혹한 책임은 초급간부들의 명예심을 드높여 주는 ‘자위적’ 수단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초급간부의 열악한 처우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은 ‘공정’에 민감한 젊은 세대의 특징에 기인한 바가 크다. 헌신이 요구되는 곳에는 그에 상응하는 존중이 따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명예심이라는 ‘소프트 파워’에 국격에 걸맞은 복무 여건이라는 ‘하드 파워’를 더해야 할 때이다. 두 파워는 군이 스스로 해결할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온 국민이 군을 사랑하고, 군인을 존중해 주는 사회적 공감대가 먼저 형성되어야만 가능하다.
미국과 달리 군 복무가 빛나기는커녕 빛바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그 어떤 것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기 때문이다.
새로 취임한 국방부 신원식 장관은 ‘초급간부 복무 여건 개선’을 위한 내용을 ‘지휘서신 1호’에 담았다고 한다. 차관 주관의 협의체도 구성한다고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감사하면서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핵심 내용으로 초급간부의 처우 개선을 위한 하드 파워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담고 있다. 남은 과제는 온 국민이 우리 군을 지지하고 군인을 예우하는 것이다.
부국강병, 군인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
지난 주 우리 군의 초급간부들이 보수교육을 받는 상무대를 다녀왔다. 이곳에서 진중교회를 담임하는 한 성직자를 만났다. 상무대는 외진 곳에 떨어져 있는 탓에 세간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다. 당연히 진급을 앞둔 군 간부들은 이곳에 전속(轉屬)되기를 꺼린다. 하지만, 오늘날 초급간부들이 갖는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픈 사명감 하나로 달려왔다고 한다.
군 생활의 추억과 군에서 복무하고 있는 친동생 생각에 장병들의 음식값을 대신 내준 미담이 있었다. 휴가차 나온 군인에게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예쁜 손글씨와 함께 커피를 건넨 카페 알바생도 세간의 화제였다. 국가보훈처 박민식 장관이 알바생을 수소문하여 찾았다는 소식도 들렸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같은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고위 공직자의 병역 면제에 관한 씁쓸한 통계자료와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다.
가자지구에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떠올려 본다. 중동의 집사라 불리는 쿠르드족은 나라가 없는 서러움이 가득한 민족이다. 나라가 있어 강한 군이 존재하는 것은 큰 복이다. 군의 소중함을 알고 군인을 예우하는 것을 보면서 자란 다음 세대들이 군인의 꿈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나를 따르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창끝에서 초개와 같이 몸을 던질 사람들이 초급간부다. 며칠 전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84기 신입생 모집을 위한 체력검정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젊은 날 군인이 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달리는 우리의 아들과 딸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해 보였다.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 나오는 가슴 속 더운 피, 장미보다 진한 피의 향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졸업식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내년 2월 말이면 육군사관학교 제84기 입학식이 예정돼 있다.
대통령이 졸업식이 아닌 입학식에 참석하여 신입생도 한명 한명 가슴으로 안아주면 좋겠다. 입학식이 입학식 이상의 의미를 충분히 갖고도 남을 것이다.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나는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바람이 미쳐 날뛰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나는 숨지었노라.”(모윤숙,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