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칼럼] 차별과 편견
주말 저녁 온 가족이 안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여섯 식구가 좁은 방에서 함께 영화 <파워 오브 원(The Power of One)>을 시청했다. 모두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 큰 감동을 받았다.
주인공 PK는 아프리카너(Afrikaner, 16세기 후반에 종교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이주한 백인집단)이다. 영화는 ‘분리주의’, 즉 인종차별이 국법이 된 상황에서 흑인 차별에 당당히 맞선 내용을 줄거리로 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의 백미는 차별에 맞선 용기보다 주인공이 이러한 용기를 가지게 된 배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일인 교사, 권투 코치, 여자 친구 등 올바른 것을 깨닫는 지혜와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 등을 가르쳐 준 환경이 주인공 주변을 감싸고 있다.
차별은 개인 혹은 집단을 부당하게 구별하여 대우하는 행위다. 아울러 차별의 원인은 편견이다. 편견이 추상적 태도와 믿음이라면, 차별은 편견에서 발생하는 언행이다.
필자 또한 유학 시절 가끔 차별적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계 교수의 가르침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편견과 차별이 심한 나라가 대한민국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차별이 불러오는 후과가 무섭다. 따라서 차별을 불러오는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자란다. 사회인이 되어서, 특히 책임 있는 자리에서 차별을 나타내는 언행은 더 이상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든다.
얼마 전 미국 전역에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들풀처럼 번진 적이 있다. 편견과 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과잉 진압을 했던 경찰관에게 공무집행에 따른 해명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며칠 전 이 경찰관이 교도소 내 다른 수감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인종, 성별, 장애, 지역, 학벌 등에 따른 차별적 언행을 일삼아도 짧은 비난에 그친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에 따르면, 차별은 명백한 위법행위다.
편견과 차별의 큰 문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주도하고 있으며, 그런데도 아무런 사과, 반성, 나아가 처벌이 없다는 점이다. 여권의 한 인사가 인요한 박사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넨 적이 있다. 야권의 한 인사 또한 여성을 ‘암컷’이라고 비하했다.
당시의 정황과 앞뒤 문맥을 따져보니, 이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백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 성차별을 가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지금까지 한마디 사과나 반성을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사회도 잠깐 떠들썩했을 뿐 이들의 발언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도 아는 바를 사회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들이 별 고민 없이 자행한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임이 틀림없다. 외국이었다면 이미 이들의 정치생명은 물론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편견과 차별. 한낱 해프닝이 아닌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자 범죄로 인식하자.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영화가 아니라 편견과 차별없는 이 땅에서 감동받는 내일을 소망한다.
“편견은 분별 없는 견해다.” <볼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