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④] “예배당 종 치던 돌간이 형, 그때 참 미안했어요?”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 안소니 퀸이 맡아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하고 소중하기만 합니다. 힘들고 고단할 때는 그 시절을 자주 재생해 내곤 합니다. 기억은 추억을 낳고 추억은 어느새 전설이 됩니다. <아시아엔>은 젊은시절 신춘문예를 두드리며 고향의 향기를 글로 담아온 우기복씨의 수필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충청도 향토색 짙는 언어와 살아오면서 채워지지 않는 순간 순간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우기복 자유기고가] 오늘은 오래된 기억 두가지가 떠오른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나는 누님과 고모를 따라 성탄 준비하는 걸 구경하러 나선다.

무낙골(서천군 기산면 수출리) 예배당 성탄행사 중에 성극은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많아서 단연 인기인데, 그 시간이 되면 졸음도 오지 않았다.

극 중 여자 주인공은 머리에 흰 치마를 묶어 뒤로 넘긴 모양의 너울을 만들어 쓰고 흰 치마 저고리를 입었는데 어린 천사와 같은 모양을 내었다.기억나는 대사는 이렇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하늘나라 계시는 우리 어머니. 내일은 나의 생일 기쁜 날이요/ 어머니 어머니 돌아오세요. 어느 날에 공원에 놀러 갔더니/ 양산 쓰고 가는 이 어머니라고/ 옆으로 달려가서 쳐다보니 해뜻 않고 말없이 지나갑니다.”

그날 밤 무낙골 예배당 안은 참나무 장작 타는 냄새와 그 열기로 후끈후끈 하였는데, 난로 옆 나무기둥에 열기가 가해져 관솔 괭이가 징징거리며 뜨거워질 때면 머릿골이 패기 시작한다. 당시는 출입문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들여 마시거나 싱건지나 대나무 잎을 눌러 담은 김칫국물을 마시곤 했다.

고모님과 누님들이 성탄절 노래 합창을 할 때면 나는 놋 난로 참나무 더운 열로 쩍 벌어진 틈을 들여다보며 송진 냄새를 맡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가장골까지 고모 등에 업혀 왔고 그 다음부터는 나 혼자 걸어왔다.

이번엔 부끄러운 기억이다.

금강에 이르는 너른 들녘에 자운영 붉은 꽃이 눈앞 가득히 물든 들판을 지나 외가가 있는 금당(서천군 화양면) 가는 길은 아홉 모랭이, 아홉 고개를 지나 구절초가 널려있는 산 언덕 넘어, 왕소나무 빽빽한 동산이 이어지고 그 끄트머리가 금당이다.

외가에 갈 때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집이 돌간이네 집이다. 봄날이 지나도록 얼굴을 덮는 귀 더펄이 모자를 쓰고 새벽마다 예배당 종을 치던 이를 마을 사람들은 돌간이라고 불렀다.

종지기 돌간이는 늙은 어머니와 둘이서 마굿간 옆 헛간을 빌려 바람 막고 살았는데 사람들은 돌간이가 배냇 병신이라 하였다.

전신마비여서 뒤틀린 몸으로 침을 흘리며 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체장애인이었다.

말을 못하고, 말보다 손발이 먼저 앞서는 그의 모습은 머리칼이 없어 정수리까지 빠져 있고, 가죽만 남은 긴 얼굴은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콰지모도와 같은 모양새였다.

일을 할 수 없는 돌간이는 남의 집 베(모시) 김을 매며 생계를 꾸리는 늙은 어머니의 시름거리였다.

근동 동네에 소문이 알려져 이집저집 구걸하며 살았는데, 돌간이에게는 주일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뒷자리 문간 옆에 앉아 있다가 난롯불 장작을 날라오거나 난로 위 주전자 물을 살피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나는 외가에 가면 돌간이를 만날까 보아 마음을 졸였다. 돌간이는 나를 보면 반가워서 네발로 달려오는데 나는 그때마다 기겁을 하였다. 묵은 구장 어르신네 영멀 외손자가 왔다고 입을 벌려 웃으면서 손짓 발짓을 다 한다.

인심 좋으신 묵은 구장 어르신을 생각하며 그의 짧은 기억력으로 나를 급히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때에 내게 작은 용기라도 있었으면 단 한번이라도 아는 체를 하여 주었을 것을.

심약한 꼴이 밴 나는 지레 겁 먹고 외삼촌 뒤에 피하기만 바빴다. 어릴 적부터 박힌 내 약골 기질을 지금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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