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②] 6.25전쟁의 아픈 기억들
[아시아엔=우기복 자유기고가] “인생의 목숨은 초로와 같고/ 고구려 삼천리 역사 반년···이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어 깨나라”
초성 좋은 춘매 외삼촌이 부르던 노래는 생각만 하여도 목이 메인다. 우리 동네는 면 소재지여서 인민군들이 제일 먼저 찾아왔는데, 밤이 되면 남자들은 동네에서 몸을 피해야 했다.
어느 날 밤, 미군 ‘쌕쌕이’가 쏘아대던 따발총 소리에 놀라 급히 다리 밑으로 피하던 큰어머니가 다치신 것도 그때였다. 망루같이 높이 쌓아놓은 자리에 들어선 주재소(지서) 밑에 양조장 큰아버지네 메가리깐(정미소) 그리고 ‘준코’라고 예순네 한약방이다.
내가 자주 놀러 가던 준코네 집에서는 언제나 한약 냄새가 물씬 났는데, 그 집 툇마루 끝에는 반질반질하니 새카맣게 웅크리고 앉아있던 청동 항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부젓가락으로 불을 다독거리시던 준코네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빛이 늘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서 한 발자국 떼기가 힘이 들었다.
준코네 아버지 약방 어른은 지서에 불려가서 매를 맞다가 그 밤이 밝기 전에 서천등기소에 끌려가 불에 타 돌아가시었다. 그날 밤 등기소 큰 우물에서는 붙잡아온 양민들을 샘 속에 몰아넣고 소금 뿌려 죽였는데, 재 넘어 누구는 그 속에서 살아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나는 주재소 앞을 지나가는 일이 싫었다. 언덕 위에 높게 선 지서에서는 밤마다 외마디 소리가 들리었는데 내 짝꿍 명옥이 아버지는 지서 뒷편 일본식 화장실과 연결된 대기소에 갇히었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고춧가루를 탄 물을 주전자로 코에다 붓는 벌을 받다가 쓰러져 반편이 되어 돌아오셨다.
한산 가는 돼지고개에 비 오는 저녁이면 군홧발 걸음소리가 따라온다고 하여 장날에도 혼자서 돼지고개 넘어가기를 꺼리었다.
그후에 준코네는 타지로 이사하고, 준코네 집은 춘매네가 들었다. 춘매네가 와보니 ‘집 임자’라 하는 팔뚝만 한 구렁이가 지붕 속에 살았는데, 점심 먹고 낮잠을 잘 때면 천정으로 기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집 임자는 남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 하였다.
돌아보면 우리의 지나온 세월, 지나간 날들이 거저 지나간 것이 아니고 눈물과 고통의 시간이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