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⑦] 호수돈여고 가는 길 국화빵 추억
서천읍에서 대전행 버스를 타면 벌써 코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차표를 끊어주시고 활명수같은 체증약을 먹으라고 하셨지만 활명수를 먹어도 차 멀미는 마찬가지다.
서천 차부에서 출발한 버스가 읍내를 벗어나서 더털더털 흔들어대며 몇 고개를 지나가면 머리가 지끈지끈 하는데 백마강이 가까운 홍산에 닿으면 멀미는 더욱 심해진다. 그때부터 내 눈은 버스 창문 손잡이만 바라보고 있다. 여차하면 얼른 문을 열고 고개를 차창밖으로 내밀어야 하니까, 문이 잘 열리는지 고장이라도 나지 않았는지 확인해 두고 자리에 앉는다.
집에서 대전에 갈 때와는 달리 방학이나 토요일 집에 올 일이 있는 날이면 차멀미 걱정은 마찬가지이지만 그까짓 구역질 두어번 하면 고향에 간다는 마음이 앞서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치곤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열차로 가는 길이 있는데 열차는 버스와 달리 멀미가 조금 덜했다. 열차는 서대전역이나 대전역에서 호남선을 타고 이리를 거쳐 군산으로 가는 편이 있는데, 군산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거나 한참을 걸어야 군산 죽성포 째보 선창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장항행 여객선을 타야 된다.
선창가는 밤낮으로 바람이 센데 그래도 멀리 장항제련소 굴뚝 구멍만 보아도 우리 집에 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항행 여객선은 쉴 사이 없이 오가는데 배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장항항에 내려서 다시 버스 차부까지 얼마를 걸어가야 서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장항에 가면 작은 누님이 일하는 시온모자원이 있는데 누님이 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모자원은 김옥선이라고 남장 여자 국회의원이 운영하는 정의고등공민학교와 모자원이 있었다. 누님은 거기 선생으로 일하셨다. 이렇게 군산으로 가는 길은 여러 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강경 가는 길을 택한다.
강경역에서 내려 역전 광장을 건너면 옛날 강경포구까지 언덕을 넘어 등에 땀이 날 정도로 걸어야 강을 건너는 거룻배 편이 있다. 강을 건너면 세도까지 넓은 모래밭 길인데 여기부터 온통 땅콩밭이다. 장마때 물난리라도 나면 모래 바탕 길을 걸어야 버스를 탈 수 있다. 겨우 버스에 오르면 생선 비린내와 온갖 어물냄새가 거기에 있는데 차를 타기 전부터 골이 울리는 나에게 그 냄새는 너무나 견디기 어려웠다.
차가 출발하여 이제 마음 놓고 집에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놓일라 하면 속도가 느린 차가 모랫속에 바퀴가 박혀 한참을 실랑이를 해야 했다. 이제 가든지 말든지 관심을 꺼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거기부터는 멀미가 덜하였는데 그것은 집에 가려는 욕심이 멀미를 잊게 하였는가 싶었다.
그곳은 5일마다 장이 서기 때문에 장날이 걸리는 곳이면 버스 안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맨 먼저 임천 장에 이르면 한 떼의 사람들이 차에 오르고 차 안은 숨쉬기도 힘들게 된다. 그렇게 조금 가면 여산이 나온다. 여산 하면 생각 나는 사람이 있다. 여전도부인(전도사)이다. 사촌 누님을 중신한 깔끔한 여 전도부인은 쪽머리같이 올려서 길죽하게 느려있는 머리 모양이, 그 당시엔 쉬이 볼 수 없는 멋쟁이셨다.
후끈 바닷냄새가 차창 틈으로 들어오면 버스는 힘이 달리는지 덜덜거린다. 건지산이 보이는 한산을 지나 험한 돼지고개만 지나면 우리 집은 눈앞이다. 여기부터 차멀미는 모두 달아나고 대신 기쁨이 샘솟는다.
그렇게 고생 고생하며 고향 집에 가는 일은 공부보다 몇 배 더 즐거운 일이었다. 그곳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고 할머니 누님들 동생들이 모여 사는 햇살 밝은 우리 집이 있기 때문이다.
호수돈 여고 가는 길
도청에서 죄회전하면 선화동 사거리, 그 길로 직진하면 방송국과 교도소가 나온다. 좌회전 하면 깡통 교회가 있는 고갯마루에 호수돈여고, 그 길옆에 농업을 가르치시던 서 병국 선생님 집이 있었다. 건너에 나의 하숙집이 있는 송판 울타리 골목이 나온다.
아침이면 두부장사 종 치는 딸랑딸랑 소리가 들린다. “갈치나 아지~” “아지나 꽁치~” 하는 새벽을 가르는 지게장사의 발걸음이 바쁘다. 거기 양 길옆에 국화빵 집이 있는데 달고 맛이 있는 팥고물을 듬뿍 넣은 단팥빵 맛은 가히 일품이다. 그 동네는 하숙집이 많은데 우리 반 친구 둘이서 지내는 자취방이 있었다.
연산 사는 친구의 자취방은 언제나 싸늘하였다. 구하기 어려운 조개탄이나 연탄가루를 뭉쳐 말린 주먹탄으로 난방을 해야 하는데 돈 때문에 마음대로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는 집에서 나무를 가져와서 밥은 화덕에 해 먹고 군불은 별도로 피웠다.
추억의 호남선과 소나무의 송진이 엉긴 괭이나 나무뿌리 그리고 아버지가 준비해준 땔감을 차곡차곡 묶은 단을 매고 도둑차 빵차를 타고 서대전에서 내려 개구멍으로 빠져나오는 친구가 떠오른다. 지금도 애틋하고 잔잔한 기억이 되어 나를 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는 것 같다.지금은 사라진 기차 통학생이 당시엔 제법 많았다.
한 반에 10여명 이상이 천안 방면이나 논산 연산 통학생이었다. 대부분 통근 차표를 끊지만 몇 달이 지나면 호기심이나 생활의 어려움으로 개찰구를 거치지 않고 들어가 있다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떠나는 기차에 올라타는 위험한 무임승차도 밥 먹듯 하였다.
자취방에 가면 겨울에도 방 안에 있지 못하고 볕이 좋은 날이면 밖에 나와 햇볕을 쬐며 공부를 하였다. 끼니 때가 되면 양재기에 밥을 지어 먹는데,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 멸치볶음이나 된장에 박아 만든 장아찌가 전부였다. 자연 토요일이나 휴교 시 집에 가는 게 최고의 낙이었다.
그 시절 국화빵의 맛도 잊을 수 없다. 오가면서 냄새로 맛 보지만 큰 마음 먹어야 한 접시 시켜먹는 국화빵은 고작 일년에 몇 번에 불과했다. 간혹 여자 친구가 생긴 아이들이 빵집에 들어가 현찰이 없으면 학생증을 맡기고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