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⑩] 동생 꽃상여와 공군 헌병대 추억

꽃상여 <사진=다음 블로그>

나의 인생에 또 다른 기억은 사랑하는 동생을 잃어버린 아픔이다. 입대하여 한참 군대생활에 재미가 붙을 때였다. 사천비행장이 한참 활주로 공사가 진행되던 1969년 6월 16일 교대근무를 위하여 저녁을 마치고 나가는데 한 장의 전보를 받는다. “교통사고 기식 사망 급래”

어제 밤꽃 냄새를 맡으며 산길을 가는 꿈을 꾸었는데 눈앞이 깜깜하였다. 군산 메디칼센터 시체실. 아이는 대형차 운전면허를 따서 수습으로 모래를 실어나르는 트럭을 따라다녔는데 무더운 날 바닷가에서 점심 후 그늘에서 쉬다가 누구의 실수였는지 뒷바퀴에 치인 것이다.

누구보다 영특한 아이, 부모님 마음을 기쁘게 하던 아이, 어려운 일을 가리지 않고 살려 했던 아이였다. 신외과, 삼성운수 사장 김재준과 면허증 없는 운전자 등 들어맞지 않는 변명. 시민병원 그리고 도립병원 거기 시체실에서 멈추었다. 군산 고등동 늘 다니던 교도소 고갯길을 지나 상고 길을 빠져나와 너의 꽃상여는 호곡도 없이 공동묘지 안 영원한 땅에 머물렀다.

시계는 오후 5시. 사람은 누구나 이럴 수밖에 없는가. 앞에는 호수, 멀리 군산 앞바다. 뒤에는 겹겹이 산. 산수가 맑으면 어떻고 휜히 트였으면 뭐하노?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돼지고개 내리막길을 손수레 끓고 빠르게 내려가는 아이. 교복 입고 책가방을 싣고 학교 가는 길이다.

너는 발이 보이지 않게 급히도 달렸다.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하였던 너희 포부를 나는 셈하지 못하였다. 너의 두발이 지금 내 눈앞에 쉬지 않고 뛰고 있는데 너의 가죽 신발이 변색된 채 너무 확실하여 나는 눈을 감을 수 없다.

성실고등공민학교(한산면 소재) 입학부터 졸업하는 날까지 부모님이 시작하신 양품장사를 도우려고 손수레를 놓지 않고 무거운 짐 싣고 학교에 가고, 학교 파하면 시장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손수레 끌고 험한 돼지고개를 땀 흘리며 넘어가던 너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 없이 돌아가는 손수레 바퀴처럼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다. 너는 새로운 일을 위하여 둘째 누님이 있는 군산 신영동에 머물면서 어려워진 가계를 도우려하였다. 생각해보면 네가 피땀 흘릴 때 나는 타지에 있다는 핑계로 내몫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군산, 우리에겐 많은 이야기가 있는 포구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월명공원 아래 영화동에 가면 다다미방과 조개탄 냄새가 가득하던 홍숙이네. 만주에서 내려온 홍숙이 아버님은 달구지를 끌어 생활하였다. 길 건너에는 미군 상대로 살아가는 양공주들이 창문을 열고 낯선 웃음을 웃고 있었다. 군산은 밤이 되면 네온이 찬란한 우리에게 낯선 이국이었다.

군산항 바람 부는 오후 뱃머리에 모두 서서 가물가물 보이도록 손 흔들고 서 있는 매형을 보고 있다. 그 후 부모님은 순영이 데리고 상경하셨다.

군대생활

사랑하는 동생을 보내고 나의 군 생활은 그야말로 생각도 없이, 후회도 없는 부질없는 감정으로 점철된 헛발질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깊이도 모르고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아 돌아온 것이 무엇이었던지 생각하면 낯 뜨겁기만 하다.

뉘우친다.

공군기술교육단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김해 비행학교로 배속되어 졸병생활을 정신없이 하고 다시 헌병대에 배솟됐다. 거기서 고된 생활 속에서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보람도 있었다. 사천비행장의 활주로 확장공사를 시작하면서 그곳으로 이전하여 다음 해 6월 동생을 보낼 때까지 졸병이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병영생활을 하였다. 그 6월 이후 갈등과 방황, 부질없는 후회와 원망이 들끓던 낭비의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군기가 심하기로 유명한 헌병대 생활 속에서 선후배 간에 인간적인 접촉으로 고통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인간적인 유대감을 주어 잊을 수 없는 시절이기도 하다.

보이러실 동기 김도일, 철뚝 아래 수진리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하였던 통신대 동기 한복수, 급양대 강영을, 지금도 만나는 장동환, 문학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군종병 유두열, 서울공대 출신의 착실한 홍영화, 사나이 이동찬, 양갈보 양철홍, 대전 출신 유병호, 사천 치(출신) 김원길, 선임하사 깜상 김용규, 그리고 최봉현과 김재경 모두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70년 9월 대전 영농교육대(전역 후 받는 교육)로 떠나오던 날 받은 한 편의 글이 남아 있다. 당시 한참 유행하여 떠다니던 글이었다.

“한 소녀가 나를 찾아 오거던(오거든) 저 먼 전선으로 떠났다고 말해주오. 아무 말도 안터냐고(안 하더냐고) 묻거던(묻거든) 고개를 옆으로 저어주오. 소녀가 눈물을 흘리거든 나도 눈물 흘리며 떠났다고 말해주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