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⑨] 그때 그 시절, ‘회한’도 ‘감사’도 가득

필자는 청소년 시절 서천 무낙골예배당을 다니며 신앙을 쌓았다. 무낙골예배당은 그후 기산교회가 되었다.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 떠나간 사람, 남들은 떠난 사람을 잊으라 하지만 그리움이 더해간다.

60년대 그 어려웠던 시절, 충청도 서천군 기산면 소재지, 사시절 마르지 않는 개울을 따라 봄이면 찔레꽃 자운영 붉은 빛, 쑥 바탕 삐비 바탕….

쪽다리를 지나면 퉤 퉤 퉤, 의미도 모르고 침 세번 뱉던 서낭당. 한낮에도 무서운 상여집, 여우굴 지나 멀리 양지바른 양지편…

거기 대나무밭 아래 양철 지붕의 예배당은 진분홍 배롱나무 무리 지어 피는 무낙골 예배당이다. 근동에서 가장 오래된 장로교회였다. 지금은 기산교회가 돼 있다. 

새벽기도 대장 어머니가 눈밭, 장대비 마다 않고 찾으시던 예배당. 누님의 등에 업히어 졸며 가던 그 달짝지근한 기억들이 활동사진같이 느리게 돌아간다.

갑자기 백만원이 생긴다면, “하야(택시)를 타고 영멀서 무낙골까지 가고 싶어라.” 찬송 밖에 모르던 당숙이 창가를 부르라 하니까 부르셨던 노래다.

눈만 뜨면 농사일로 날 저무는 줄 모르고 일하여 사람들은 “일만 하다 죽을 사람”이라고 “일만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새벽이면 일어나서 동아줄을 당겨 덩 덩 덩, 새벽종을 치던, 진한 눈썹 굵은 테 안경의 당숙은 말수가 적으셨다.

그런 당숙이지만 기도를 시작하면 어눌하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예수 믿는 일에 대한 감사와 확신이 넘치는 음성으로 회중을 압도했다. 

물려받은 가난을 이기시려 밤낮없이 논밭에 매달리다가 주의 날이면 발 벗고 나서시던 분이다. 어느 해 여름 장마로 교회 지붕이 여기저기 비가 새던 날, 밤새도록 그릇을 놓고 받으시다 주저앉아 “아버지 이놈이 죄인입니다. 우리집은 말짱한데 주님 집만 비 새게 하였습니다.” 하며 통곡하던 분. 마태복음에 나오는 백 부장같이 어진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 교회에는 두 분 장로님이 계셨는데 두 분이 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잦은 풍파가 있었다.

시골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해질 무렵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지 보면 살림을 짐작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주일이면 함께 모여 주의 날을 지키면서,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반목하다가 급기야 한 교회 두 강단으로 가기 전 목사님의 사임으로 극단적인 결과는 피하였지만, 그 반목의 결과로 심령부흥이 열화같이 치솟던 60년대 교회부흥까지 가로막고, 성령 바람까지 식히어 젊은이들의 열정을 막아 저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겼다.

얼마 후 멀리 김제에서 젊은 목사님이 오시면서, 겨울철 성경학교 사경회와 부흥회(당시는 교단을 불문하고 근동의 교회가 모두 참석했다)에서 은혜를 받자, 교회 분위기는 새로운 모습으로 회복되는데, 그 여력으로 미루던 교회 신축이 시작된다.

목사님의 눈물 어린 기도와 성도들의 헌신으로 상처 입었던 교회가 하나가 되자, 교회 사랑과 협동이 생기며 한해 동안 부역의 대장정이 이루어지면서 그림 같은 아름다운 석조 예배당이 세워진다. 교회 안정이 성도들 마음을 살찌우고 믿음을 키워 은혜로운 공동체가 된다.

그러나 그 평안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성도와 불신도를 가리지 않고 대하시는 젊은 목사님이 교회 얼굴에 먹칠한다는 풍문이 돌았는데, 그 소문이 실체가 되어 겨울이 지나 물소리가 뚝을 치던 춘삼월, 선애 아버지 신동영 목사님은 짐을 싸셨다.

“교회 지으면 오래 못있는 거여.”

중직들의 병이 도진 것이다. 신 목사님은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이번 목사님은 서울에서 오신 평안도 선천이 고향인 임문수 목사님으로 자녀가 일곱이다. 자녀 교육은 할머니가 서울 해방촌에서 콩나물 장사하며 숭의 숭실 오산 학교를 보냈다. 임문수 목사님은 평안도 말씨로 열정적인 설교를 하셨다. 

그 후. 나는 대전에서 학업 중 몇 년이 흘렀다. 방학이 되어 내려가니 임 목사님이 떠나신다 하였다. 목사님의 자녀가 많은 탓이라 한다. 교인들의 아쉬움 속에 새 임지인 서산 모항교회로 떠나시는 날, 정거장은 울음바다였다. 이불 보따리와 가재도구 책가방이 버스에 실리고 사모님 손을 잡고 오르던 늦둥이의 뒷모습이 선하다. 겨울의 마지막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아침이었다.

“날이나 풀린 후에 가시라 하지.” 어머니 말씀에 “이제 목사님 선보러(후임 영접위원) 안 다닐꺼야.”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설 자리 없는 목사님들에게 힘이 되어드리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하시던 당숙도 그렇게 오래 사시지는 못하고 당신이 바라고 소망하시던 본향 천국으로 가신다.

‘만났다 헤어지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는 교회 현장을 보면서, 그저 그 일이 인생유전의 한 과정이지만 이별에도 예의가 있고, 교회는 먼저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후 무낙골교회는 나누어져 두 곳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면 소재지에 교회를 다시 신축하면서 하나가 된다. 내가 살던 고향을 생각하면, 평화롭고 안락한 곳이었지만 그 고향에는 반듯하게 살고자 하였던 당숙의 몸부림이 있었고, 목회 열정을 펴지 못하다 어깨를 움츠리며 떠나신 목사님들의 눈물이 있었다.

지금은 떠나간 사람. 그분들의 면면을 떠올릴 때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리운 것이다.

1968년 11월 12일 김해 공군비행학교라는 보라매 마크의 작은 앨범 첫 장에 ‘거인의 길’이라고 굵은 체로 쓰고 “데데하게 살려면 차라리 집어치워. 무지 막한 엉뚱체로 난필된 사진 한 장이 있는데 야외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와이셔츠 차림의 곽영수 목사님이 찬양을 지휘하는 사진 밑에 “젊음과 이상이 넘치든다” 푸른색 언더라인이 그어져 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살아질 뿐이다“ 맥아더 장군의 이야기를 하면서 대구 주암산에서 내려오시던 날 실버들 봄비를 맞으며 좁은 비닐우산을 함께 쓰고 바윗돌 사이를 나무 지팡이 의지하여 내려오시던 목사님은 주암산 금식기도가 힘드셨을 텐데 어린 나를 생각하여 신앙과 인생 삶의 이야기를 하여 주셨다.

그해 여름 충남대 농대가 보이는 대전 문화교회 새로운 임지로 자리를 잡으시며 사모님과 성원 성화 그리고 고흥이 집인 고모 순이씨와 그해 여름 승려 출신으로 개종한 재모형… 대구 영우와의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지금 내게 남아 있다.

교회는 어느곳이나 중직들이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종들을 품지 못하고 자기 의사와 통하지 않으면 “신비주의”니 “이단”이니 하며 하나님의 의가 아닌 사람의 의를 위한 저들의 처사가 많은 선량한 교우들을 시험에 이르게 하고 있다.

그 여름 사택 모기장 안에서 내게 해주신 “사람은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씀을 오늘 다시 생각한다.

4월이 오면 온양 삼일교회 부활절이 생각 나고 그 때면 온천리(온양읍) 사택 베고니아와 이름 모를 화초가 피던 정원이 떠오른다. 세발자전거 타던 성원이의 검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런데 다음 사진을 보면 대전 문화교회 장면인데 성원이도 사모님도 표정이 밝지 않은 게 느껴지는데 어떤 예시된 암시가 있었나 보다.

성령운동이 열화같이 오르던 60년대 목사님의 부흥성회는 연중 짜인 일정 속에서 주일 오후만 되면 다음 주 일정을 위하여 열차를 타시었다. 그때는 주일 저녁부터 일주일 내내 어느 땐 교회의 형편으로 주일까지 성회를 연장하기도 하였는데 여행 가방에는 상시 흰 고무신과 내복 와이셔츠가 준비되었다.

열과 성을 다하는 부흥회는 강사에게는 그야말로 진액을 빼는 일이었다. 그래서 토요일 집에 오면 깊은 휴식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삼각산 용문산 팔공산 금식기도를 하셨다.

그런데 여기 비행학교에 와서 목사님을 아는 사람을 만났다. 온양 사람 인사과 유선남 일병과 대구가 고향인 대구 수영동 동북교회의 이 하사다.

나는 이따금 대구역 2번선 구름다리 밑에 서계시던 목사님을 생각한다.그런데 지난주 서울 다녀올 때에 그 2번선 구름다리 밑 기둥 옆에 안경 쓴 사람이 서 있었는데, 대구 집회에서 돌아오다 열차에서 세상 뜨셨던 그분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민족과 역사와 시대를 바로잡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라”

보내주신 서신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계획하였으며 무엇을 시행하였던가?

여기서 나는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성가곡이 있다. 김두남 곡 ‘본향을 향하네’다. 인생의 거친 들에서 짧은 생애를 복음 전하다 본향을 향하신 분에 대한 송가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떄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난의 궂은 비바람

환난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모질게 불어도

천국에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시골 교회 겨울철 사경회 성경공부 강사로 오신 온양 삼일교회 곽영수 목사님은 활동교회 새벽예배 열화같은 부흥의 불길이 오르던 시절이었다.

저녁 집회를 듣고 철야, 새벽이슬 내리던 석촌교회 성회를 참석하던 날이 있었다.

심령대부흥성회 장소 활동교회

자 1964년 12월 14일 (일요일)

지 1964년 12월 19일 (금요일)

강사 : 곽영수목사

대전사범 휴학한 후 신앙의 갈등과 진로의 문제 그리고 어린 시절 꿈많던 때에 만났던 분이다. 학교에 복학하고 아버지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왔을 때 주님을 만나게 하였고 예수 믿는 기쁨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사모님은 나에게 한없는 위로와 힘이 되었는데 나는 그분이 혼자되시어 아들과 딸의 가정문제가 겹칠 때에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고 방관하다가, 혈압과 당뇨 그리고 정신적 곤궁에 있을 때 익산 친정 동생의 잘못 인도도 나는 방관만 했다. 개신교 목사 부인이 천주교 노인복지관에 의탁되어 마지막 생애를 음성 꽃동네에서 마칠 때까지 수수방관한 잘못을 뉘우침 하나로 나의 잘못을 종결하려 하고 있다.

마지막 전보 “부친 사망 급래” 성화가 보낸 전보다. 며칠 후 대전 보문산 기슭 작은 자리에 영원히 묻히실 때까지 짧았지만 내게 긴 이야기를 남기셨다. 20년 40년이 지나도 같은 이야기 나는 아직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지난 일로 남았다

“그것은 할 일을 다 하지 못함이요 나의 인생이 남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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