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①] 고구마 반쪽의 행복···1950년대 서천 시골 아스라이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하고 소중하기만 합니다. 힘들고 고단할 때는 그 시절을 자주 재생해 내곤 합니다. 기억은 추억을 낳고 추억은 어느새 전설이 됩니다. <아시아엔>은 젊은시절 신춘문예를 두드리며 고향의 향기를 글로 담아온 우기복씨의 수필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충청도 향토색 짙는 언어와 살아오면서 채워지지 않는 순간 순간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우기복 자유기고가] 어려웠던 시절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1950년대 충청남도 서천. 내 마음의 소중한 기억속의 곡간이 있는 땅. 내 고향은 영멀(서천군 기산면 소재지) ‘헹게’다.
헹겟산 기슭을 타고 내려오다 머문 곳에 헐릴 듯 버티고 서 있는 초가집과 비바람에 숨은 듯 웅크린 곳에 두어채 토담집이 있었다. 그 많은 기억 중에 하나, 고구마 이야기이다.
논이야 몇 뙤기 되지 않는 터에서 양식은 한정된 양의 수확인지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만, 한가지 아쉬움 없이 흥청망청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고구마다.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도 하였는데 (여름에 수확하는 감자는 ‘하지감자’라 함) 초여름부터 고구마 신세를 지기 시작하면 가을과 겨우내 비벼댈 것은 고구마뿐이었다.
고구마순 국에 고구마순 나물, 고구마 밥, 찌고 굽고 다지어 끼니때마다 먹는 것이 고구마뿐이니, 주룩 간장 한 종지 치고 한 보시기 떠서 휘휘 둘러 마시면 온종일 들일에 지친 삭신이 고들고들 해진다.
아침부터 고구마로 시작하여 세 끼니를 고구마로 때우면 물리지 않나 하겠지만 물리는 것은 한두 끼 이야기이지 먹는 것이 고구마뿐이면 입맛이 입맛이 아닌, 이런 것을 인에 박힌다 하였다.
초가을 약이 덜 찬 쥐밤 같은 쫑고구마부터 먹기 시작하면 수확을 마친 텅 빈 밭이랑 흙더미 속에서 묻어나온 이삭 고구마의 뜨끔뜨끔한 맛까지 자랄 대로 자라서 벌어진 밤고구마와 물고구마의 차이. 익힌 맛과 찐 맛 그리고 누릇누릇 구운 고구마와 살짝 얼리어 깎아 먹는 생고구마의 산뜻한 맛은 다르니 고구마는 분명 좋은 음식임을 알 수 있다.
고구마 종자는 거둘 때부터 영근 놈을 골라서 하나하나 짚으로 싸서 응달에서 말린 후에 눈비 피하여 갈무리하는데 종자 고구마는 때깔만 보아도 다음 해 농사를 점 칠 수 있다.
정이월 지나 땅에 봄기운이 들기 시작하면 미리 점지해놓은 터에 씨고구마를 심는데 무엇보다 거름이 좋아야 굵고 여문 고구마 순을 삯(싹의 옛말) 낼 수 있다.
양지 바른 곳에 정 방향의 모판을 파고 잘 썩힌 소 두엄을 박아 놓은 곳에 종자 고구마를 놓으면 토실한 굵은 삯이 뻗는데 고구마를 거두고 난 빈터에도 인분을 끼얹어 두었다가 해동하면 봄갈이로 썩어놓으면 그 해에는 땅빛이 달라지며 밭두둑이 불거지고 골이 쩍쩍 갈라지는데 땅이 갈라지면서 쑥쑥 내민 고구마를 보면 부엉이 집을 만난 것 같다.
고기가 뻑뻑하게 국 말아 나오고 먹을 것이 진진한 부엉이 집은 아니지만, 긴긴 봄날 하루 세끼 양껏 먹을 수 있고 어느 때고 허기진 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고구마뿐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서 어두워지도록 온 들을 헤집고 다닌 까닭에 건넛방에 고구마 붓장(고구마를 겨우내 저장하기 위해 싸매어 두는 가마니나 짚단을 말함)을 채웠고, 토굴에도 고구마 더미 헛간마다 말리어 놓은 고구마순은 밑반찬에 좋고 삶은 고구마순은 해가 긴 봄날 허기진 배를 채워준다.
내 고향 헹게의 겨울은 춥고 배고픈 기억뿐이지만 지금도 나에게 남아있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구마가 준 충만함과 빈들에서 여름내 헤집으며 살다가, 그래도 이 겨울을 살게 한 보람이 여기 쓰러져가는 움막 안에 가득하게 채워졌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