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⑤] 서천역으로 아버지 마중 가던 그 밤길의 추억

장항선 구 서천역 건물. 이 글 가운데 나오는 서천역은 이 역사 건물보다 훨씬 앞서 지어진 것으로, 사진으로도 좀처럼 남아 있지 않아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에게나 아련하고 소중하기만 합니다. 힘들고 고단할 때는 그 시절을 자주 재생해 내곤 합니다. 기억은 추억을 낳고 추억은 어느새 전설이 됩니다. <아시아엔>은 젊은시절 신춘문예를 두드리며 고향의 향기를 글로 담아온 우기복씨의 수필을 독자들께 전합니다. 충청도 향토색 짙는 언어와 살아오면서 채워지지 않는 순간 순간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아시아엔=우기복 자유기고가] 7~8월 장마철 개울이나 웅덩이에 나가면 살이 오른 참게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한낮 물가에 나가 통발을 대고, 물이 흐르는 물꼬에 하얀 자갈을 깔아놓고 이슬 먹으러 기어 나오는 참게를 기다리는 것이다. 물속에서 나온 게는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하여 진한 거품을 품어내는데 그 부글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장마가 지면 게는 더 많이 내려오는데 큰아버지는 게를 잘 잡으셨다.

별세때까지 당신의 걸음과 목소리 지켜낸 큰아버지

큰아버지가 새뚝 밑 우리 집으로 내려오실 때면 땅이 꺼지는 소리가 난다고들 하였다. 그는 “동생 있어?”라며 동네가 먼저 알아듣게 하셨다. 평소에 조용하시다 갑자기 50마력 짜리 발동기 소리를 내시어 별명이 ‘우당탕’이셨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옆집 장로님은 나를 보며 한마디 하신다.
“큰 우집사(나의 큰 아버지)마냥 소걸음이네. 아니 더 껑쭝대는 걸.”

성미가 급하고 경우가 바르신 소방대장 출신 아버지와 달리 앞뒷머리가 튀어나오고 체형이 커서 어딘가 모자란 듯하지만, 나는 나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생을 이뻐하는 아버지보다 큰아버지가 더 좋았다.

메가리 깐에서 나오던 왕겨의 거친 면과 쌀겨의 부드러운 면을 함께 지니셨던 큰아버지는 혈압으로 세상 뜨실 때까지 당신의 걸음과 당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셨다.

그 시절 서울~서천 구간을 달리던 완행열차


밤길 서천역으로 아버지 마중 가던 추억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와 서천역에 도착하시는 시간은 대부분 밤 10시 이후가 되어 누님 셋과 고모님 그리고 어떤 때는 할머니까지 합세하여 마중 나간다. 영멀 우리 집에서 서천까지는 10킬로미터가 족히 되는 길인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없어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내려오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서천역 (마루보시)소화물 차를 이용하여 화차에 쌀을 싣고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에 파는 일을 맡아 하셨다. 중앙시장은 쌀 도매상이 모여 있어 전국 쌀이 모여드는 곳인데 도르메(서천군 화양면 소재지) 이모부도 같은 사업을 하셨다. 시골 5일장에서 쌀을 사서 서천역 소화물에서 기차에 싣고 한달에 몇 번씩 올라가신다.

그 쌀을 넘긴 돈을 가지고 내려오시는 길이었다. 현금을 광목으로 짠 전대에 돈을 담아 몸에 두르거나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열차에서 날치기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서 서천 쌀은 인정받아서 상회 곳곳에 팔았는데 서천에는 근동에 쌀 도매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가을걷이가 끝나면 서울에 가서 팔고 저녁 기차를 주로 이용하였다.

기산에서 서천까지 가는 길은 동네와 떨어져서 양옆에 논밭으로 이어진 외진 길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할 일 없는 흔히 건달이라고 불리는 동네 젊은이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떼 지어 있어 혼자 가기엔 겁 나는 밤길이었다. 초가을 서울에서 내려오던 등 넘어 사람이 건달들한테 매를 맞고 돈을 털렸다는 소문이 있어서 우리 식구들은 가슴 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길산 깡패들이 모여 있는 진다리나 드무니 건달들이 모여 있는 막굴재 원길패들이 잘 모이는 곧응게길 같은 곳은 위험지대였다. 누군가 쫓아온다는 긴장감으로 밤길을 걷는 맛도 있지만, 밤길에 당하는 별의별 소문이 시끄러운 때이어서 어디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등에 땀이 흐른다.

그때 서천여학교에 다니던 셋째 누님은 늘 다니는 길이라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선발대로 나선다. 밤길이 어두운 날이면 할머니는 등불을 켜주시기도 하였지만 모두 여자들이어서 나는 남자라고 앞장을 잘 세우지만 재를 넘어 드무니 앞길에 들어서면 등에서 진땀이 나는 소심꾸러기였다.

배짱 좋은 둘째 누님이 헛기침을 쿵쿵 해대지만 모두들 반쯤은 얼어 있다. 그래서 어디서 쿵 소리만 나도 한데 몰리고 키다리 사내놈이 바짝 다가와서 훑어보기만 하여도 기운이 빠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흔연하게 가야 하는 것이다.

가다가 어른이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고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벌써 우리를 알아보시고 큰기침 하시며 다가오는데, 진땀을 흘리고 나서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은 남달랐다. 그 바람에 우리 동네에서 금성 라디오를 제일 먼저 산 집이 우리 집이었다.

훗날 쌀을 실은 화차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크게 실패하면서 우리 집은 서울로 이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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