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영멀⑥] 서울 중앙시장 쌀 팔러간 아버지의 ‘추억’

1970년대 안양 중앙시장 풍경

7, 8월 장마철 개울이나 웅덩이에 나가면 살이 오른 참게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한낮 물가에 나가 통발을 대고, 물이 흐르는 물꼬에 하얀 자갈을 깔아놓고 이슬 먹으러 기어 나오는 참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물속에서 나온 게는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하여 진한 거품을 품어내는데 그 부글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장마가 지면 게는 더 많이 내려오는데 큰아버지는 게를 잘 잡으셨다.

큰아버지가 새뚝 밑 우리 집으로 내려오실 때면 땅이 꺼지는 소리가 난다고들 하였는데, “동생 있어” 동네가 먼저 알아 듣게 하시었다. 평소에 조용하시다 갑자기 50마력짜리 발동기 소리를 내시어 별명이 ‘우당탕’이셨다.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 옆집 장로님은 나를 보시며 한마디 하시었다.

“큰 우 집사 마냥 소걸음이네. 아니 더 껑쭝 대는 걸.“

성미가 급하고 경우가 바르신 소방대장 출신 아버지와 달리 앞 뒷머리가 튀어나오고 체형이 커서 어딘가 모자란 듯 하지만, 나는 나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동생을 이뻐하는 아버지보다 큰아버지가 더 좋았다.

메가리깐(정미소)에서 나오던 왕겨의 거친 면과 쌀겨의 부드러운 면을 함께 지녔던 큰아버지는 혈압으로 세상 뜨실 때까지 당신의 걸음, 당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으셨다.

시골 밤길


밤길 가는 날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서천역에 도착하시는 시간은 대부분 저녁 10시 이후가 되어서 누님 셋 고모님 어느 때는 할머니까지 합세하여 마중을 나간다.

영멀 우리 집에서 서천까지는 10km가 족히 되는 길인데 그 시간에는 버스가 없어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내려오시는 아버지를 마중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서천역 마루보시 소화물차를 이용하여 화차에 쌀을 싣고 서울 신당동 중앙시장에 가서 팔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앙시장은 쌀 도매상이 모여 있어서 전국 쌀이 모여드는 곳이다. 도르메(서천군 화양면 소재지) 이모부도 같은 사업을 하셨다. 시골 5일장에서 쌀을 사서 서천역 소화물에서 기차에 싣고 한달에 몇 번씩 올라가곤 했다.

아버지는 그 쌀을 넘긴 돈을 가지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 돈 현금을 전대라는 광목으로 칸칸에 돈을 넣게 만들어 그곳에 돈을 담아 몸에 두르거나 허리에 차고 오시었는데 어떤 사람은 열차에서 날치기 당하는 예도 있었다. 서울에서 서천 쌀은 인정받아서 많은 상회에 팔았는데 서천에는 근동에 쌀 도매상을 하는 이들이 많아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서울에가서 팔고 저녁 기차를 많이 이용하였다.

기산에서 서천까지 가는 길은 동네와 떨어져서 양옆에 논밭으로 이어진 외진길로 동네 입구마다 가을일이 끝이나 할 일이 없는 동네 젊은이(건달이라 함) 곳곳에 진을 치고 떼 지어 있어서 혼자 가기에도 겁이 나는 밤길이었다. 초가을 서울에서 내려오던 등 넘어 사람이 건달들한테 매를 맞고 돈을 털렸다는 소문이 있어서 우리 식구들을 가슴 조이게 하였다.

길산 깡패들이 모여 있는 진 다리나 드무니 건달들이 모여 있는 막굴재 원길 패 들이 잘 모이는 곧응게길 같은 곳은 위험지대였다. 누군가 쫓아온다는 긴장감으로 밤길을 걷는 맛도 있지만, 밤길에 당하는 별의별 소문들이 시끄러운 때이어서 어디서 발자국 소리만 나도 등에 땀이 흐른다.

그때 서천 여학교에 다니던 셋째 누님은 늘 다니는 길이라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선발대로 나선다.

밤길이 어두운 날이면 할머니는 등불을 켜 주시기도 하였지만 모두 여자들이어서 남자라고 나를 앞장 세우지만, 재를 넘어 드무니 앞길에 들어서면 등에서 진땀이 나곤 했다. 배짱 좋은 둘째 누님이 헛기침을 쿵쿵 해대지만 모두들 반은 얼어 있다. 그래서 어디서 쿵 소리만 나도 한데 몰리고 키다리 사내놈이 바짝 다가와서 훑어보기만 하여도 기운이 빠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흔연하게 가야 하는 것이다.

가다가 어른이라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 없고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벌써 우리를 알아보시고 큰기침을 하며 다가오는데, 진땀을 흘리고 가서 아버지를 만나는 기쁨은 남달랐다. 그 바람에 우리 동네에서 금성 라디오를 제일 먼저 산 집이 우리 집이었다.

후에 쌀을 실은 화차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크게 실패를 하면서 우리집은 서울로 이사한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