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⑥] 하얀나비의 두 느낌…’설레임’과 ‘괜한 걱정’
대전 호수돈여고 가는 언덕배기 국화빵집에서는 달고 맛좋은 단팥빵을 굽는다. 복숭아밭이 있는 용머리 고개를 넘으면 오리나무 짙은 그늘 아래 사범학교 미술관과 음악실이 나타난다. 음악실에서 울려나는 목관악기와 오르간 소리는 빠앙~ 하고 달려오는 호남선 기적소리도 잠재울 듯하다.
어느 새 언덕 위 침례신학대학에서 낯선 이국 사람들이 나온다. 언덕을 내려가면 사시사철 기름 냄새 고소한 꽈배기 공장에 부드러운 도넛과 꽈배기향이 하학길 고픈 배를 후린다.
내가 있던 하숙집은 도넛 공장에서 내려가면 법원관사가 있는 동네 붉은 기와집이었다. 송판 울타리 넘어로 해바라기가 무리 져 피고 여름이면 ‘책화’라는 이름의 붉고 하얀꽃이 종일 피어 있었다. 문간방은 노인들 사랑으로 대문 옆에 있었다.
도청 인사과에 다니던 임준석 아저씨는 검정테 안경에 숯이 많은 머리는 포마드 끼가 마르지 않았다. 말수는 적은 대신 인정이 많으셨고, 아주머니는 하숙을 많이 쳐보신 부드러운 분이셨다. 선화학교 다니던 남매가 있었고 아저씨의 막내 아우 풍우는 나와 죽이 잘 맞았지만 자주 다투었다.
같은 하숙집 이영호 형은 사범학교 본과 선배로 눈동자에 파란빛이 났는데 그 후 아무리 수소문하여도 연락할 수 없었다. 단지 알려진 주소가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낭평리 두섭말 소똥매라는 긴 이름의 동네였다.
비인면 하면 내게 늘 생각나는 문기수 아저씨라고, 우리 어머니에게 누님이라 부르던 아저씨가 사셨던 곳이다.
인간관계는 서로 만나지 않으면 남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늘 잊은 채 살고 있다.
하모니카를 잘 부는 노래쟁이 풍우는 비 오는 날이면 나를 부추기어 중도극장 운포극장 대전고 앞 군인극장에서 2본 동시상영이라고 유혹하였다. 고향이 그리운 날이면 <눈 내리는 밤> <가거라 슬픔이여>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역마차>와 같은 두 가지 동시 상영하는 극장에 앉아서 마음을 돌리곤 하였다.
서천 학생으로 통하는 내 하숙집과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건너 집에는 사범학교 본과에 다니는 머리가 노란 누나가 있었는데, 그 동생이 대전여중 학생이어서 나는 늘 신경이 쓰였다.
나무 울타리 사이에 있는 우물가에 갈 때면 화선이라는 소녀를 이따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소녀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 교내 운동회가 가까워지며 청군과 백군을 표시하는 나비 리본을 달아야 하는데 학교에서 만난 누나는 자기가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기다리던 시간, 누나 집에 가니 화선이는 고뿔감기에 들어 방문을 닫고 있었다. 한참 동안 물도 긷고 손도 씻는둥 마는둥 서성대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왔는데, 나에게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화선이의 고뿔감기와 내게 날아온 흰나비가 주는 느낌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이른 봄에 흰나비를 먼저 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방학을 고향에서 보내고 하숙집에 돌아오니 화선네는 다른 곳으로 이사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