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영멀⑧] 평생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들

우리 삶속엔 금세 잊혀지는 얼굴도 있지만, 평생을 두고 남아있는 얼굴도 있다. 사진은 경기도 광주 얼굴박물관에 놓여있는 얼굴 조각품들.

작은할아버지 집에서 큰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에 ‘돌간’이란 이름의 아저씨가 살았는데 나는 그 사람이 무서웠다. 장애인이어서 어린 내게 낯설었지만 따뜻한 심성의 사람임을 훗날에야 알았다.

큰할아버지 댁 마당에는 큰 샘이 있고, 사랑채와 안채 집 뒤에는 키 큰 감나무가 있었다. 조그만 마루도 있었는데 외삼촌은 창호지와 대나무를 깎아 연을 만들어 주고 겨울에는 앉은뱅이 썰매를 만들어 주었다. 여름방학이면 앞 들판의 농사를 위하여 흘러내려오는 개울 물가에서 종이배도 띄우고 어려운 방학숙제도 보와주셨다. 큰삼촌은 군산사범학교를 다녔는데, 장항농고 다니던 작은 외삼촌은 우리 어머니가 외동이었기 때문에 호적에 어머니의 동생으로 올려져 있었다.

큰 외할아버지는 흰 수염에 긴 담뱃대로 담배를 태우셨는데 할아버지는 동네 일이나 남의 일을 많이 하시어 근동에서 인정 많은 분으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었다. 남을 위하여 바른 삶을 사신 분으로 할아버지 댁 뒤 높은 지대에 그 공덕비가 서 있는 것을 외가에 갈 때마다 보았다.

외가를 생각할 때마다 달디 단 물엿과, 물엿으로 버무린 목화꽃 같은 한과 산자와 곶감이 떠오른다. 이것들은 큰외할머니가 잘 만들어주시던 먹거리였다. 섬세하고 어지신 ‘외할머니표 먹거리’라고 늘 생각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오랫동안 계시었는데 산 넘어 막내 이모네 가실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셨는데 할아버지를 따라 몇 년 뒤 세상 뜨셨다.

큰 외삼촌은 한마디로 잘 생기고 똑똑하셨다. 가부가 분명하고 시원시원해 이모들이 많은 외가에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우리 누님들도 삼촌을 잘 따르고 좋아하였던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성격도 그렇게 쾌활하던 외삼촌이었는데 어느 해 여름 화양초등학교에 계시던 태호 삼촌은 인생의 허물을 남기지 않으시려는 마음에서였을까 소리 소문 없이 떠나셨다.

군산은 우리 가족에게 인연이 많은 곳이다. 사랑하는 동생이 간 곳도 군산이고 그 외삼촌을 생각할 때마다 왠지 군산이 연상된다. 지금은 옛날 흔적만 남은 도시 군산이지만 내 기억 속 군산은 번쩍번쩍 네온사인이 화려한 꿈의 도회지였다. 내가 사범학교에 간 것도 큰 외삼촌 영향이 컸는데 지금은 모두 다 지나간 이야기로 내게 남아 있다. 누군가 인생은 여행이라 하였는데, 나의 지나온 세월은 하나씩 잊혀져 가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지나온 날이다.

그래서 떠나간 사람 기억에서 멀어지는 이야기는 모두 다 슬픈 영화 같이 목이 메고 가슴에 사무치지만 우리는 남은 자의 삶을 부족함 없이, 부끄럼 없이 사는 것이 우리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

이 세상 나그넷길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누구는 금방 또렷하게 형상화되지만, 누구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도 있다. 물론 먼저 가신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이지만 먼저 가셨기에 애달픈 얼굴, 내 기억 속의 얼굴인 것이다.

서천군 기산면 수출부락으로도 불린 무낙굴의 교회 기도대장 하면 우리 어머니와 어머니 절친이던 정창길 집사님, 그리고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며 무낙골교회를 섬기던 우병원 당숙을 잊을 수 없다. 정 집사님은 ‘눈물의 여인’이라 할 정도로 눈물이 많았다. 가정적으로 불행한 삶을 사셨다. 부군이 신자가 아니어서 교회 가는 것 자체를 거부당했다. 남편이 근동에서 힘깨나 쓰던 이유도 있지만, 일본 여인을 작은 부인으로 두고 살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보다 얌전하고 예의 바르어 누구에게나 잘 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일본 여인도 속아서 이곳에까지 왔다고 하였다. 양조장과 정미소를 하는 남편은 자주 구타를 하였고, 새벽기도에 못 가도록 성경도 감추고 문도 잠가놓고 별 방법을 다 하며 막았지만, 집사님의 신앙 열정은 막지 못하였다. 그럴수록 집사님의 기도는 뜨거워 갔다.

정 집사님은 전주에서 여학교도 다니신 그 시대 명문가 집안의 여인으로 두 아들을 낳았다. 일본의 둘째 부인에게서도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아이들을 교회에 나가게 하신 분도 큰엄마인 정 집사님이셨다.

정 집사님도 오래 살지는 못했는데, 서울에서 집사님의 형제들과 만나기로 한날 아침 집사님이 일어나지 않아 들어가보니 전날 저녁 잠든 상태로 깊은 잠에 들어가신 후였다. 모두 집사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차라리 저 세상 가신 것을 잘하셨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정 집사님이 천당 아랫목에 계실 것이라고 하였다.

또 한분 무낙굴교회 우 집사님은 우리 당숙으로, 성경 속의 인물로 착각될 정도로 바른 신앙을 지닌 분이었다. 먹을 거라고는 고구마 외에 없었던 시절 아침부터 논에 들어가면 해가 져야 소를 끌고 귀가하는 당숙을 자주 보았지만 가난 속에서도 새벽이면 일어나 교회종을 치셨다.

나는 당숙이 얼굴을 찌푸리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당숙 역시 오래 살지 않고 일찍 세상을 뜨셨다. 오로지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신 그분을 하나님이 사랑하시어 일찍 불러가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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