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⑤] ‘1000일의 앤’ 이어 즉위 9일만에 처형된 英여왕 제인 그레이
[아시아엔=김인철 미술평론가, 충북대 대학원 강사] 1820년대가 시작되던 10년 정도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한 흥미가 유행처럼 크게 번졌다. 구체적으로 튜더(Tudors)와 스튜어트(Stuarts) 왕조 시기 내전의 소용돌이 등이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의 소설과 역사 등 역시 인기를 얻었다.
위 그림은 역사적인 장면으로 잉글랜드에서 실제 이루어졌던 사실을 그린 것이다. 작자는 1825년과 1835년 사이 살롱(Paris Salon)에서 이른바 웅장한 장면을 잘 그려서 유명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쉬(Paul Delaroche, 1797~1856)다.
작품은 1553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King Edward VI)의 죽음에 따라 여왕으로 선포되었던 헨리 7세의 증손녀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1536~1554)의 마지막 모습이다.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1554년 2월 12일 처형되어 죽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당시 부왕 헨리 8세의 큰 딸이자 카톨릭 신자였던 매리 1세(Mary I)가 무력과 더불어 여론을 등에 업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여왕 제인 그레이의 재위 기간은 고작 9일에 머물고 말았다. 그녀는 죽기 전 악명 높은 런던타워(Tower of London)에 갇혀 있었다. 들라로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appeal) 하게끔 16세기 개신교도들의 순교방식을 그림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조작을 가했다.
제대로 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던 이 왕족 여인은 실제로는 옥외에서 처형되었다. 게다가 그림에서처럼 고래수염으로 속을 댄 코르셋과 19세기 양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약간 헤어진 흰색의 공단(satin) 드레스는 입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머리는 위로 모아 올린 형태였지 어깨까지 흘러내린 모습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사하고, 마치 인기 있는 멜로 드라마와 통속적 읽을거리(tableau vivant)라는 특유의 무대 장면을 만들고 있다.
바다 건너 나라에서 일어난 어쩌면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프랑스의 유명 화가는 유행하는 연극 속 무대 설정을 만들어 오로지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한 흥미만을 내세웠다. 아무튼 그녀가 비참하게 처형된 일은 사실이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아들에 대한 갈망은 왕권의 연장과 안정이라는 강력한 바람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는 부왕 헨리 7세(Henry VII)가 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겪었던 여러 고생(장미전쟁, Wars of the Roses)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매우 여색(女色)을 밝혔던 남자이기도 했다.
독일 출신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가 그려 남긴 그의 초상화를 보면 대부분 비대하고 무식하게 생긴, 멋대로의 남자 모습이지만 이는 나이 들어 그렇게 된 것이다. 여러 기록을 더듬어 보면 그는 젊었을 때 꽤 괜찮게 생긴 미남이자 호남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반면에 겉모습과 달리 드러낼 수 없는 병을 얻는 결과를 만들어 불행히도 이는 유일하게 얻게 되는 아들이 일찍 죽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헨리 8세가 죽은 후 왕위는 자연스럽게 아들 에드워드 6세에게 넘어가는데 그는 허약 체질을 타고나 불과 16세의 나이로 일찍 운명하고 만다. 그러자 또다른 왕위계승은 과연 누가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때 당연히 첫째 딸 매리가 등장한다.
첫째 왕비였던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의 사이에 태어났던 매리 1세는 오랜 기간 외동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헨리 8세는 매리에게 영국 왕족 중 처음으로 웨일스의 여공작(Princess of Wales) 칭호를 내렸고 최초로 독립 궁정을 만들어줄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혼에 따른 계비 앤 불린(Anne Boleyn)의 모략으로 매리가 타고났던 공주로의 자격은 정지되고 만다. 게다가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 Tudor, Elizabeth I)가 태어나자 왕위계승권까지 빼앗겨 서녀庶女의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랬던 처지는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Katherine Parr)에 의하여 간신히 공주라는 신분으로 복권된다.
그리고 그녀는 카톨릭을 고수했던 까닭에 에드워드 6세 때는 종교적인 여러 문제 등으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던 차에 국왕 에드워드가 죽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는 자기 아들과 결혼시켰던 며느리 제인 그레이를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귀족들과 국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매리는 스스로 여왕 즉위를 선언하였으며, 노섬벌랜드 공작은 체포되어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제인 그레이는 누구였을까? 이를 위해서는 헨리 8세의 여동생이자 프랑스 국왕의 왕비였던 매리 튜더부터 알아봐야 한다. 매리 튜더(Mary Tudor, 1496~1533)는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지만, 결혼 초 루이 12세가 죽자 1대 서포크 공작 찰스 브랜든(Charles Brandon, 1st Duke of Suffolk)과 결혼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과 무척 친하게 지낸 헨리 8세는 나중에 군함을 건조하면서 그녀의 이름(The Mary Rose ship)을 붙였을 정도였다. 젊은 시절 매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 가운데 하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카스티야의 카를(Charles V, Holy Roman Emperor)과 1507년 12월에 약혼했으나, 당시 유럽 열강들의 정치적 지형도의 변화로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 대신에 울시 추기경(Thomas Wolsey)에 의해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1514년 18세의 그녀는 52세의 노인 루이 12세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프랑스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는 전속 시녀 중에는 앤 불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했음에도 후사가 없었던 루이 12세는 2세를 얻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그런 와중에 1515년 1월 1일 침실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이는 결혼 3개월 후의 일로 매리는 임신도 못한 상태에서 미망인이 되었다.
왕위를 이어받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Francis I)는 홀로 된 매리를 위해 그녀가 재혼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음에도 왕가 사이의 정략적 결혼에 불만이 있었던 매리는 찰스 브랜든과 사랑에 빠진다.
이때 국왕 헨리는 여동생의 사적인 일이었음에도 왕가의 혼사였던 까닭에 자신 위주로 정략적 고려를 하면서 매리가 잉글랜드로 돌아올 때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겠다는 브랜든의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1515년 3월 3일에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당연히 이일은 브랜든이 국왕의 동의 없이 공주와 결혼한 것으로, 반역죄에 해당하는 짓이었다.
이에 헨리는 분노했고, 추밀원에서는 브랜든을 체포,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울시 등의 중재와 여동생과 브랜든의 진실한 사랑을 가엽게 여긴 헨리는 결국 무거운 벌금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두 사람은 1515년 5월 13일 그리니치 궁전(Greenwich Palace)에서 공식적으로 결혼하였다.
매리는 네 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그중 둘째이자 장녀가 나중에 도싯 후작 헨리 그레이(Henry Grey, 1st Duke of Suffolk, 3rd Marquess of Dorset)와 결혼하는 프랜시스, 즉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Lady Frances Brandon)으로, 그녀가 제인 그레이를 낳는다.
제인 그레이의 부모였던 후작 부부는 사냥과 파티를 즐기는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제인은 그와 정반대로 학구적이고 내성적이었다. 부모는 딸의 나약함을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자주 체벌을 가하고 심하게 꾸짖었으며, 그런 일이 이어져 사이가 멀어져만 갔다.
반면에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한 제인은 대신 공부와 독서에 더욱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알았고, 종교개혁에 크게 감화된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신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1546년부터 제인은 헨리 8세의 제5 계비이자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의 저택에서 살게 된다. 캐서린 파는 모성애가 강한 여성으로, 제인과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에게 애정을 쏟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1547년, 국왕이 서거한 후 토머스 시무어(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와 결혼했던 캐서린 파 역시 첫 아이를 낳고 산욕열로 숨을 거두면서 제인의 평안했던 생활도 끝이 났다. 이때 제인은 캐서린 파의 장례식에서 상주(chief mourner)의 역할을 맡았다.
제인의 부모였던 후작 부부는 당초 토머스 시무어의 도움을 통해 제인을 에드워드 6세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토머스가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하는 일이 벌어지자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그레이 가문은 화를 입지 않고 다행히 살아남았으나, 프랜시스 브랜든은 딸을 왕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야심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1553년 제인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1st Duke of Northumberland)의 아들 길포드(Lord Guildford Dudley)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을 격렬히 거부했지만 부모의 강압을 이기지 못했고 종교개혁을 통해 힘을 얻었던 노섬벌랜드 공작은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죽으면 카톨릭 신자로 부적격자였던 왕녀 매리 1세를 제치고 국교인 성공회 신자인 제인을 충분히 왕위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을 굳건히 했다.
드디어 에드워드 6세가 세상을 뜨자 부모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인을 왕위에 올렸다. 이때 유력 왕위계승권자인 매리는 존 더들리가 자신을 체포하여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서포크(Suffolk)의 프람링엄 성(Framlingham Castle)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정작 제인 자신은 왕위를 원하지 않았고, 아울러 남편 길포드에게 여왕 배우자로의 실권을 주라는 시아버지의 압력에도 완강히 저항했다.
게다가 이때 민심은 매우 불행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왕녀 매리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리하여 제인이 즉위한 지 겨우 9일 후인 7월 19일 매리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자, 그레이 후작 부부는 딸 제인을 팽겨치고 바로 런던 밖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제인과 길포드 더들리는 반역죄로 런던탑에 유폐되었으며 존 더들리 공작은 처형당했다.
비록 제인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매리 1세는 제인의 목숨을 살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1554년 1월, 토머스 와이어트(Sir Thomas Wyatt the Younger)를 중심으로 성공회 신자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인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가담하면서 성공회교도 왕위계승권자인 제인을 살려두는 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리 1세는 제인에게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제안을 했지만 제인이 이를 거절하면서 제인과 길포드의 참수가 결정되었다.
그렇게 세상을 뜰 당시 그녀의 나이 고작 열여덟 살이었다.
순진무구하고 자신의 수양에만 힘을 쏟던, 그저 인문학적 소양이 깊고 품위가 있던 한 왕족 여인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부모 친척에 의한 정치적 모략의 희생양이 되어 정말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