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⑥] 日판화에 빠진 반 고흐가 그린 미술용품상 뻬레 땅기

뻬레 땅기의 초상(Portrait of Pere Tanguy), Van Gogh, 1887-1888, 92 cm x 75 cm, Musée Rodin, Paris

우키요에(うきよえ, 浮世絵, Ukiyo-e)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에서 유행한 판화, 채색 목판화 및 회화를 말한다. 그것들의 주제는 가부키(かぶき, 歌舞伎) 배우와 스모 선수, 그리고 미인들 또는 민속적인 내용과 역사, 여행 모습 등이었다.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 마치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세상’으로 보여 그렇게 불렀다. 이는 판화를 만들 때 적절한 물의 농도에 따라 변화무쌍한 세계가 나타나서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물에 적신 물감을 바르고 눌러 나타난 세상은 경이롭기만 했다.

17세기 초, 현재의 도쿄인 당시 에도(Edo, 江戸)가 막 막부(幕府) 정권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이어 도시의 경제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물자의 공급을 담당하던 하층민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연예 산업이 번창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즉 가부키 극장, 매춘부, 기생 등이 있는 환락가가 이루어졌다.

이런 모습을 주제로 한 우키요에 이미지들이 나타나 무사(武士)를 비롯한 상업으로 부유해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많은 사람들의 집에 주요한 장식품이 되었다.

작품 ‘뻬레 땅기의 초상(Portrait of Père Tanguy)’은 1887년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에 의하여 파리에서 그려졌다. 반 고흐는 파리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느낀 미술적 분위기를 석 점의 땅기 초상화에 담았다. 첫 번째 것은 소극적이며 조금은 음침한 모습을 단순한 구도로 그린 것이었고, 둘째 것에 일본 판화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에서는 인상주의를 비롯한 당시 파리 미술계의 영향과 함께 일본 취향의 색상과 기법을 통합하여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작품에 그가 스스로 찾고자 했던 내면의 침착함이 담겨있다.

1886년 네덜란드를 떠난 반 고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해에 미술상이자 동생인 테오(Theo)와 함께 있고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때까지도 매우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결코 변하기 어려운 성격과 더불어,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계의 첫 반응은 그저 그랬다.

그가 네덜란드의 거장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파리로 와서는 인상파, 상징주의(Symbolism), 점묘파(Pointillists)로 바뀌었으며, 일본 취향(Japonism) 역시 수용했다. 그러면서 까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툴루즈-로트렉(Henri Toulouse-Lautrec), 뽈 고갱(Paul Gauguin), 에밀 베르나르(Émile Bernard), 뽈 시냑(Paul Signac) 등과 친구가 되었다.

아울러 히로시게(Utagawa Hiroshige, 歌川広重 1797~1858), 호쿠사이(Katsushika Hokusai, 葛飾北斎, 1760~1849)의 작품을 중심으로, 일본 채색목판화의 평면적이면서 그림자 없이 생생한 색면 양식에 빠져들었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 동안 그는 파리에 머물면서 여러 장르의 그림들을 실험하면서 그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그런 가운데 제작된 이 그림은 모델 땅기의 상점에 팔렸다. 그림을 보면, 모델 땅기가 앉아 있는 뒷 벽에 많은 일본 채색목판화들이 붙어있다. 땅기가 쓰고 있는 모자 위에 후지산(富士山)이 있고 벚나무에 꽃이 핀 그림과 가부키 배우들 이미지가 보인다.

반 고흐는 일본 판화를 통하여 어떤 영혼의 고요를 추구했는데, 이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타난다. ”가능하면, 마음의 평정을 갖고자 노력한다. 아무것도 없으며 모르는 상태, 이것이 아마 약국에서 파는 모든 치료제보다 더 확실한 것일지도.“

그의 그림에 그런 고요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땅기를 내세워 마치 명상하고 있는 듯이 그렸는데 이는 동양의 부처(Buddha) 모습과 같다고 상징주의 연구가 나오미 머러(Naomi Maurer)는 언급하고 있다.

1890년 반 고흐가 죽고 4년 후 땅기도 세상을 떴다. 그가 죽자, 딸은 그림을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에게 팔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로댕미술관(Musée Rodin)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파리 출신의 줄리앙 프랑스와 땅기(Julien François Tanguy, 1825~1894)는 미술상이면서 미술 용품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반 고흐의 그림을 팔고자 노력한 최초의 화상이었다.

화가들에게 보인 열정적 태로도 인하여 그의 상점은 당시 파리 미술용품 상점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그를 뻬레(Père, 아버지)로 불렀는데, 실제로 그는 어려운 처지의 화가들에게 격려의 말을 아낌없이 해주었고, 돈과 음식까지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림 재료 값으로 작품을 대신 받기도 했다. 몽마르뜨르에 있던 그의 상점에 들어가면 매우 많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고 에밀 베르나르는 기억한다. 그러나 땅기와 달리, 그의 부인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꼭 그 자리에서 돈을 받아내는 스타일이었다. 결국, 남편이 죽자마자 그의 상점에 있던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경매에 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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