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21] 벨라스케스 ‘세비야의 물장수’와 김창열 화백, 그리고 ‘북청 물장수’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0년경, 106.7x81cm, 런던 앱슬리 하우스 소장

이 그림을 보면서 작년에 작고한 세계적인 화가로, 물방울을 주로 그렸던 한국 출신의 김창열(Kim Tschang-yeul, 金昌烈, 1929~2021)을 생각했다. 그리고 물을 팔아 자손들을 학교에 보냈다는 함경도 북청(北靑) 물장수도.

화가 김창열 선생과 물방울 작품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guez de Silva y Vel?zquez, 1599~1660)는 스페인 바로크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국왕 필립 4세의 궁정화가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밧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대표적인 기법이었던 ‘광선에 의한 극적 화면 방식(tenebrist style)’으로부터 이어받은 관련 묘사에 충실했지만, 점차 자신만의 대담한 붓터치에 의한 개성을 발휘한 작품들을 만들어 나중에 에두아르 마네(?douard Manet)와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 같은 유명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궁정화가로 있으면서 특유의 개성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그려 ‘시녀들(Las Meninas, 1656, Museo del Prado, ?Madrid)’ 같은 명작을 남겼다.

벨라스케스는 ‘세비야의 물장수(Waterseller of Seville)’라는 제목의 작품을 석 점 그려 남겼다. 그중 지금 보고 있는 첫번 째 그림이 가장 잘 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그가 십 대 후반 또는 이십 대 초반에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서는 노인, 소년 및 배경 속 행인을 볼 수 있는데 물장수인 노인이 소년에게 유리컵을 건네주고 있고, 그들은 서로 외면하고 있다. 아울러 이들은 보는 이들과도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림은 작자가 살던 세비야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물을 팔면서 살던 하층민을 나타내고 있으면서 물동이와 같은 물건들로 특유의 스페인풍 정물화(bodeg?n paintings)를 연상시킨다.

그림 속의 모델인 소년은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명작 ‘계란을 부치는 할머니(Old Woman Frying Eggs, c. 1619,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속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 앞부분에는 물장수의 거대한 물동이가 제법 무겁게 놓여 있으며, 표면에는 흘러내린 물이 만든 얼룩과 함께 작은 물방울들이 반짝이고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세비야의 물장수'(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0년경, 106.7x81cm, 런던 앱슬리 하우스 소장

무척 크고 둥근 그것은 마치 보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튀어나오려는 듯하다. 이어 물장수는 유리잔에 물을 새롭게 부어 소년에게 건네주고 있는데 그 안에는 물맛을 더 신선하게 만들기 위한 조향제(perfumer)인 무화과(fig)가 들어 있다(이런 방식은 오늘날 세비야에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작품은 선술집(tavern) 안 혹은 바로 근처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조명은 왼쪽으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오면서 소년의 모습과 항아리 표면의 물방울을 밝고 영롱하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작가는 세심한 표현을 했는데 이런 방식이 바로 벨라스케스 그림의 특징이다.

정지된 듯 고요한 장면, 그리고 전형적인 장르(genre) 회화의 특성으로 인하여 벨라스케스의 다른 같은 제목의 조금 다른 작품들에서도 물장수에 대한 특유의 묘사를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광선을 바로 받으면서 마치 물에 흠뻑 젖은 듯 적지 않은 나이로 주름이 깊게 패어 수심에 찬 얼굴에서 물장수로 오래 살아온 경륜을 말해주고 있으며, 짧게 깎은 머리와 입고 있는 낡아빠진 옷으로 인하여 마치 수도사이자 성자, 아니면 괴짜 철학자와 같이 보이도록 만드는 장면이다.

작가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및 관심과 더불어 성경 속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예수(the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에서와 같이 단순한 행위이자 하찮은 몸짓이 성스러울 수 있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한 화가가 성숙한 작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성실함의 시작이 바로 물장수라는, 매우 평범한 인물에 대한 통찰을 나타낸다.

다시 한번 자세히 언급하자면, 작품의 색상과 구도, 조명 등에 큰 영향을 준 작가는 바로 카라밧지오였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카라밧지오처럼 공격적이며 도발적이지 않았고 필요 없이 이상화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확한 삶을 표현하기 위하여 충실한 방식으로 장면을 나타내고자 했다.

한편 벨라스케스의 실제 스승은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였는데 그는 자신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파체코는 이 작품을 보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까닭은 벨라스케스가 당시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별로 좋지 않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그림 역시 거장 벨라스케스가 만들어 낸 전형적인 명작의 하나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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