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⑧엘리자베스I세] 불굴의 여왕. 대영제국 기초 세우다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I), 무명작가, c. 1575, 113 x 78.7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에 대하여 영국의 역사학자이면서 중세와 튜더왕조 전문가로 BBC 방송에서 일하는 헬렌 카스터(Helen Castor)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어쩌면 괴물처럼 여겨지던 아버지 헨리 8세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더 빨리 그 존재가 떠 오르는 사대의 아이콘(icon)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우리에게 인식이 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 중 글로리아나(Gloriana, 엘리자베스 여왕의 별명이자 별칭)는 가면(假面, mask)이랄 수 있다. 말 그대로 그녀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20년 동안 그려지고 알려진 ‘젊음의 가면’ 초상화라는 뜻이다. 그 그림에서 엘리자베스의 주름이 전혀 없는 얼굴은 늙지 않고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스크라는 방식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전혀 미동이 없다.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설을 했고 편지와 시를 썼으며 국가와 사회를 위한 기도도 했는데 그렇게 공개적 또는 사적으로 또는 궁정대신들에게 언급한 것들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실제 의미했던 바를 확실히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그녀가 당시 썼거나 말한 모든 단어에 나타난 자신의 지적인 수준만큼은 분명하며, 그녀의 의도와 감정, 어조와 진정성 등이 항상 조심스럽게 구성된 공식적 자아라는 표면 뒤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다.

그녀에 대하여 자세히 읽어내기가 힘든 일은 역사 속에서 밝은 면만으로 이루어졌던 일종의 속임수라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후손에게 만큼이나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런던 주재 스페인 대사가 1566년에 쓴 것처럼 – 특히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난처한 문제에 관해 – “그녀의 제안은 매우 날카로운데 또 한편으로 왔다갔다 한다. 무엇이 그녀가 가장 친밀하게 여기는 대상인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녀의 그런 의도에 대하여 복잡하게 해석하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발언에 대한 의도를 확신하기 어려웠다면, 그녀의 침묵을 해석하는 일은 더 어렵게 된다. 그녀가 단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침묵을 지키게 된 그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사건은 바로 아직 세 살도 되지 않았던 1536년 5월, 어머니 앤 불린(Anne Boleyn)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던 일을 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뿐인 아이가 무섭도록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직면하게 되는 매우 충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후 한 번도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녀가 한 번도 어머니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데 그렇게 된 근거에는 처형에 대한 책임자였던 아버지(King Henry VIII)를 매우 두려운 사자(lion)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엘리자베스는 점차 자신의 주위 환경부터 관찰했고, 조심스럽게 적응을 시도하면서 어머니의 친척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말년에 그녀는 자신과 어머니의 미니어처 초상화를 공개하기 위하여 뚜껑이 열리는 아름다운 반지를 간직했다. 그런 침묵의 행동 뒤에 숨은 구체적인 감정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해석하더라도 어머니의 폭력적인 죽음이 그녀에게 아무런 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증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녀의 내면에는 과도한 자신감이 아닌, 뿌리 깊은 불안을 낳을 수 있는 일종의 정서적 외상과 그에 따른 부조화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충분하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섯 명의 남자와 간통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사람이 외삼촌이었으며 그들 모두 함께 참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랐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승인 없이 나은 삶을 희망할 수 없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확실성이라는 존재였다.

12세의 엘리자베스가 유일하게 남긴 편지에서 그녀는 헨리 8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고 가장 자비로운 아버지, 신성한 법과 아울러 모든 의무에 따라 다양한 방편으로 당신이라는 폐하에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보다 확실했던 사실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너무 어려서 당시 자신의 위치가 매우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3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더 이상 왕위 계승자도 공주도 아닌, 어머니와 아버지의 결혼 무효 결정에 따라 단순히 ‘엘리자베스 부인(Lady Elizabeth)’이라는 명칭의, 일종의 사생아였다. 이러한 지위에 대한 변화 없이 1544년의 왕위계승법에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이복 언니 매리(Mary I)를 동생 에드워드(Edward VI) 왕실에 대한 상속인으로 지명했는데 이는 헨리 8세의 사생아 지명의 연장이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듯하여 일종의 모순으로 여겨지면서 점차 엘리자베스의 미래는 정치적인 궁지에 몰렸다. 대부분 왕실 여성의 삶은 국내 및 대외 외교의 움직임에 따라 높은 신분의 남편과의 결혼이라는 일이 운명이었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이복 언니는 그런 결혼 게임에서 그 가치를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여왕이 될 수도 있는 왕녀들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엘리자베스는 자신 앞에 놓인 삶을 결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머니의 가혹한 운명과 결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신체적, 정치적 위험에 대하여 비교적 의혹이 덜한 삶을 이어갔고 아홉 번째 생일이 되기 전에 그녀는 세 명의 계모를 얻었고 잃었다. 그들은 제인 시무어(Jane Seymour), 클레페의 앤(Anne of Cleves), 그리고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였다.

그러는 가운데 네 번째 계모인 캐서린 파(Katherine Parr)는 1543년 여름부터 왕가의 세 남매를 불러 이른바 가족과 같은 생활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격랑은 가깝게 전달되었고 그녀를 보호할 의무가 있던 왕위 계승자로서의 동생 에드워드의 존재 역시 스페인 혼혈 언니 매리처럼 그리 친밀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1547년 1월 일어난 헨리 8세의 사망 이후 그녀 존재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1548년 2월 무렵에 그녀는 과부가 된 캐서린 파와 그녀의 새 남편 토마스 시무어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에게 취한 매우 무례한 행동과 그 저의로 인하여 토마스 시무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에드워드 왕과 각료들은 시무어를 지켜보다가 체포한 후 반역 혐의로 사형에 처했는데 이때 엘리자베스는 15살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시무어의 접근에 저항하지 않았는데 그랬던 사실이 잘생기고 세심하면서도 나이 든 남자에 대한 사춘기의 호감보다는 그렇게 다가오는 그 남자와 결혼과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상상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시무어는 엘리자베스를 취하여 왕위를 차지하려 했었다. 이 사건으로 그녀는 왕실의 공주들이 친숙했던 주변 환경에서 떨어져 외국으로 보내지면서 겪어야 했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일단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울러 당시 진행되었던 토마스 시무어의 재판에서 엘리자베스 역시 심문을 받게 되는데 주제는 토마스 시무어의 성적 희롱 또는 폭행의 정도였다. 그녀를 담당했던(나중에 고초를 겪게 되는) 로버트 티르윗 경(Sir Robert Tirwhit)은 “그녀가 매우 재치 있는, 뛰어나고 멋진 사고를 가졌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썼다. 그후 엘리자베스는 또 다른 큰 사건으로 교훈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조용히 독서만 하면서 지냈고 그러면서 불확실하기만 한 미래에 대비했다.

1553년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난 다음, 왕위 계승을 위한 또 한번의 소용돌이(제인 그레이, Lady Jane Gray, 매리 1세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그녀는 반역에 다시 엮일 수 있다는 심리적 트라우마 등으로 신체적 어려움까기 겪게 되었다. 건강 이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평정심은 시무어 사건 당시와 마찬가지로 유지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녀와 관련된 어떤 연결된 음모는 없었다. 당시 매리 1세가 의문을 갖고 그녀를 다그쳤다면 상황은 또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때 진실의 편이었다고 할 수 있던 스페인 대사가 이를 악물고 “엘리자베스를 정죄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관식 복장의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in Coronation Robes), 무명작가, 1600 and 1610 copy of a lost original of c. 1559,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1558년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를 무렵 그녀는 권위와 정치적 권한은 있었지만 그리 안전한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가 갖추었던 조심스럽고 미묘하며 예리한 지능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에 가면을 쓴 모습으로 위조되었다. 지켜보고 기다리며, 친구를 사려깊게 선택하고, 적들을 더욱 신중하게 지켜보는 본능으로, 그녀 개인과 왕국에 대한 돌연한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그녀는 새로운 여왕으로의 길로 인도되었다.

가능하면 쾌활함을 유지하려 하면서도 파악되기 어려웠던 그녀였지만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숨어 있는 존재였다. 그러면서 통치 초기 그녀는 종교, 혼인, 국내 정치 논의, 외교에 관하여 명확한 입장을 취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분야라는 이유로 그녀를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에는 거절했다. 각료들은 변화, 전쟁, 혼인, 상속인 지명 등 대한 그녀의 거역하는 식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군주로서의 엘리자베스의 야심은 일관되었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위험을 촉발하기보다 현재 상황에서 파악된 위험들을 우선 관리하고자 했다.

그런 완전하지 못한 경험 속에서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군주 중 한 명이 나타날 수 있음이 확실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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