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⑦] ‘차갑고 따스했던’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1세, 공주 시절(Elizabeth I, a Princess), William Scrots, 1546-1547, Royal Collection, London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위주로 드라마틱한 그림을 그려 성공한 화가였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1833, National Gallery, London)’이라는 작품의 작자이기도 했던 그는 아카데미에서 닦은 탄탄한 고전주의적 기법에 낭만주의적 스토리를 담는 방식의 그림으로 매우 유명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구약성서로부터 주제를 가져온 것들이었으나 점차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를 주로 다루었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은 당시 꽤 인기를 끌었는데 시대적인 요구도 있었지만, 인테리어와 의상 등 세심한 장면 설정 등이 그 이유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The Death of Elizabeth I, Queen of England), Paul Delaroche, 1828, 422 x 343 cm, Musée du Louvre, Paris

1827년과 1828년 쌀롱(Salon)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The Death of Elizabeth I, Queen of England)’으로, 여왕이 세상을 떠난다는 표면적인 주제와 달리 배경 속 여러 모습, 장치들로 인하여 다소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심하게 이루어진 소도구들, 즉 가구, 의상과 같은 장식들로 인하여 어쩌면 현대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면 전체를 보면 위쪽부터 어두운 배경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아래로 이어지면서 점차 밝아지면서 바닥에 면한 팔걸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죽음에 이른 여왕이 있는 곳은 마치 집중 조명을 받은 무대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오른쪽 부분에는 관료, 장군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서 있는데 이는 여왕이 이룩한 정치 외교적 성공을 나타낸 것이며, 왼쪽에서는 시녀들로 보이는 여인들이 큰 슬픔에 빠져있다. 그렇게 내부적으로도 안정적 치세를 이룩했던 여왕이 이제 승하(昇遐)한 것이다.

여왕의 얼굴과 드러난 팔은 이미 푸르스름한 상태이다. 들라로슈답게 여왕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주변 모습을 통하여 그녀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Elizabeth I, Elizabeth Tudor, 1533~1603)은 1558년 11월부터 1603년 3월까지 무려 44년 동안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이복 언니 매리 1세(Mary I, Mary Tudor, 1516~1558)로부터 왕위를 이어 받았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두 번째 왕비이자 ‘1000일의 앤(Anne of the Thousand Days)’이라 불린 앤 불린(Anne Boleyn, c. 1501~1536)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로 인하여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 등 열강의 위협과 더불어 과다한 국내에서의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던 16세기 초반 여러 악조건을 극복하고 세계 최대 제국으로의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는데 이는 ‘성처녀 마리아(Virgin Mary)’라는 기독교에서의 열광과 같은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시나 초상화 등으로 그려진 그녀는 백성들에게 일반적 여성이 아닌 ‘성처녀’와 ‘여신’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구체적으로 그녀가 유지한 ‘처녀’로의 이미지는 꽤 괜찮은 미덕으로 여겨졌다. 1559년 그녀는 잉글랜드 하원(the Commons)에서 “그리고 내가 죽은 다음, 대리석 돌에 당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처녀로 살다가 죽었다고 선언하듯 새겨주는 정도면 족하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

그에 따라 시인과 작가들이 앞다투어 그녀가 언급한 말을 채택하여 그녀를 우러러보는, 일종의 도상학(iconography)까지 개발했고, 1578년에 이루어진 ‘동정녀’에 대한 공개적 경의 표시는 여왕이 마침 앙쥬 공작 알랑송(Duke of Anjou and Alençon)과 물밑에서 이루어지던 결혼 협상에 대한 대중의 반대라는 부호(code)로까지 작용했다. 프랑스의 알랑송 공작은 국왕 앙리 2세(King Henry II)와 메디치가 출신의 캐더린(Catherine de’ Medici)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독신을 지속한 여왕의 삶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계모(Catherine Howard)가 부왕 헨리 8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했던 토머스 시무어 제독(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이 국왕의 허가 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던 일 등이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캐서린 파의 초상(Katherine Parre), 무명 작가, 16세기 후반, 63.5 x 50.8 cm,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한편,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Catherine Parre, 1512~1548)는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모두 죽어 홀몸이었고 왕가와 먼 인척 관계인 귀족의 딸이었다.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가 처형당한 지 1년 만에 헨리 8세와 혼인을 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그녀는 처음부터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의 오빠였던 토머스 시무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심 많고 인내심이 강한 여성으로, 나이 든 국왕을 잘 보살피면서 자신의 자식도 아니었던 매리와 엘리자베스 두 왕녀와 왕세자 에드워드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녀로 인하여 왕가의 자제들이 다시 궁으로 돌아와 훌륭한 학자들을 모시고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1547년 11월 헨리 8세가 세상을 뜬 후 다시 홀몸이 된 그녀는 드디어 토머스 시무어와 재혼한 후 엘리자베스 공주를 불러 가족처럼 함께 지냈다.

그런데 이때 토머스 시무어가 은근히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고 엘리자베스에게 접근하였고,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를 끌어안기까지 하는 장면을 목격한 캐서린은 급기야 엘리자베스 왕녀를 다른 거처로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문제는 토마스 시무어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신으로 서로 소식을 이어가면서 지낼 수 있었는데, 그러는 도중 캐서린은 딸 매리를 낳은 후 산욕열로 3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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