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②] 영국 국왕 헨리 8세와 왕비들
[아시아엔=김인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여인들, 즉 왕비들 이야기는 살펴볼수록 흥미롭다.
게다가 당시 그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의 역사 및 주변국가들과의 관계 등을 살펴보면, 그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스캔들로, 그의 재혼에 따른 영국 국교회(성공회, 聖公會, Anglicanism, Episcopal Church)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 수 있다.
그런 과정에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 Giulio de’ Medici, 1478~1534)가 나타나는데 그는 누구였던가.
바로 자신의 가문에게 권력을 주고자 교황 식스투스 4세(Pope Sixtus IV)가 꾸몄던 ‘파치가의 음모(Pazzi conspiracy)’로 잔인하게 피살되는 피렌체의 권력자 로렌초(Lorenzo de’ Medici)의 동생 줄리아노(Giuliano)의 아들이었다.
관련하여 지난번 내용을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결혼하지 않았던 줄리아노에게는 피오레타 고리니(Fioretta Gorini)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들 줄리오(Giulio)가 있었는데, 아이는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 한 달 후 세상에 태어났다.
소년 줄리오는 큰아버지 로렌초와 큰어머니 클라리체(Clarice)의 사랑과 양육 속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나중에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 Giulio de’ Medici, 1478~1534)가 된다.
줄리아노 메디치의 아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완강하게 헨리 8세의 재혼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잉글랜드에서 카톨릭이 폐지되고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가 만들어졌다.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는 아버지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원래 왕세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형 아서 튜더(Arthur Tudor)가 왕위계승자였다. 하지만 아서가 이른 나이에 돌연 사망하자 왕세자 자리를 헨리가 물려받았고, 게다가 형수였던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게 된다.
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England)의 국왕(재위, 1509년~1547년)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였으며, 150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튜더(Tudor) 계로는 두번째 왕이었다. 그는 형수인 왕비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하여 딸 매리 튜더(Mary Tudor, 매리 1세, Mary I)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 20년 후부터 별거했다.
그리고 1520년대 초 무렵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시녀 앤 불린(Anne Boleyn)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로마 교황청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심 끝에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분리했다.
이어 자국 내 카톨릭교회와 수도원들을 해산하고 그곳의 부속 영토와 재산을 몰수하였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카톨릭에 충실했던 인물로, 종교개혁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두 명의 왕비와의 이혼은 물론 그들을 처형했으며, 토머스 모어(Thomas More),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 등 능력 있는 시종과 공신들 또한 사형시키는 무리수를 범하면서 왕실에 대한 비판을 막았다.
그 결과 잉글랜드에 비로소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어 절대왕정이 확립되었으며, 그는 그 외에도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르네상스적 인물로 일컬어졌다. 궁정을 매우 화려하게 꾸미면서 학문과 예술 혁신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스스로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기도 했다.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초창기에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신앙심이 깊어 일찍이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비판한 ‘일곱 성사의 옹호(Defense of the Seven Sacraments)’를 저술하였다. 이를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옹호자(Defender of Faith)’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때의 호칭 ‘신앙의 옹호자’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도 사용 중이다.
그리고 그 자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파문을 불사하며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감행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카톨릭의 근본 교리와 전례를 인정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에서의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Edward VI)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때 가능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