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③] 엘리자베스1세 생모 앤 블린 런던탑에서 참수형
형수였다가 부인이 되는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은 괜찮은 인격의 왕비로 궁에서 나름대로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녀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 de Arag?n)의 막내딸이었다. 스페인과의 동맹을 위한 정략결혼에 의하여 잉글랜드로 시집 왔지만 나름 현숙했던 여인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헨리에 의하여 배척당했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더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헨리 8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왕실의 결혼 추진으로 약간의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열일곱 살 나이에 결혼과 더불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국 내에서 왕위 계승 전쟁(장미전쟁, Wars of the Roses)을 겪었던 사실 역시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들을 낳지 못하는 왕비 캐서린으로 인하여 점차 조급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그들에게 자식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의 슬하에는 딸 매리(Mary I)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헨리 8세는 왕비의 젊은 시녀 앤 불린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런 관심은 점점 더 심해져 마치 집착처럼 이어졌다. 이들의 관계는 아들을 원하고자 했던 필요와 왕권을 물려받게 되는 이의 어머니라는, 서로의 야욕이 맞물려 매우 구체적으로 깊어져만 갔다.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이 나중에 받게 되는 공식 칭호는 헨리 8세의 제1 계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Elisabeth I)의 생모이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하여 다분히 자국민 위주의 종교개혁을 일으켜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떼어내 독립시켰다.
한편, 앤의 아버지는 외교관 토머스 불린(Thomas Boleyn, 1st Earl of Wiltshire)이었고 어머니는 명문 하워드 가문의 엘리자베스(Lady Elizabeth Howard)였다.
이후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가 되는 캐서린 하워드(Catherine Howard)는 그녀의 외삼촌 에드먼드 하워드(Lord Edmund Howard)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 매리 불린(Mary Boleyn) 역시 헨리 8세의 정부였지만, 그것은 짧은 기간이었고 매리는 이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의 미망인이 되었다가 나중에 윌리엄 스태포드(William Stafford)와 재혼한다.
앤은 총명하고 재치 있는 성격으로,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공부하며 예절을 배웠기 때문에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숙했다.
그녀가 맡았던 일은 루이 12세(Louis XII)의 왕비 매리 튜더(Mary Tudor, 헨리 8세의 누나)의 시녀였는데 루이 12세가 죽고 프랑수아 1세(Francis I)가 즉위하자 다시 왕비 클로드(Claude of France)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는 적지 않은 기간 프랑스에서 보내면서 프랑스식 옷차림, 문학, 음악 등이 몸에 배어 있었다.
1521년경 그녀는 오몬드 공작(Earl of Ormond)과의 결혼을 위해 고국 잉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왕비 캐서린의 시녀가 되었다. 이후 그녀의 혼인은 지참금 등의 문제로 결국 없던 일이 되었고, 이어 노섬브리아 공작의 후계자 헨리 퍼시(Henry Percy, 5th Earl of Northumberland)와 사랑에 빠져 다시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 일마저 토머스 울시 추기경(Cardinal Thomas Wolsey) 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앤 불린의 외모는 미인으로 여겨지던 금발은 아니었지만, 진갈색 머리와 눈을 가져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유행의 최첨단을 걸었던 프랑스 궁정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매우 세련된 여인이었다.
그리하여 헨리 8세는 앤의 언니에게서 눈을 돌려 그녀에게 유혹의 마수를 뻗쳤다.
반면에 앤은 헨리 8세로 하여금 그녀가 왕자를 낳아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혼인이 추진되면서 동시에 왕비와의 이혼을 시도하려는 헨리 8세에게 캐서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로마 교황 역시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이라는 수단을 들고 나와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했음은 물론 나아가 자신 스스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던 것이다.
1529년 앤은 왕의 총애를 받으며 잉글랜드 궁정의 안방을 차지했지만, 여러모로 진실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캐서린 왕비를 쫓아낸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1532년 헨리 8세는 앤에게 펨브로크 후작(Marquess of Pembroke)이라는 지위를 내려 그녀의 신분을 높였다. 이는 미혼 여성(결혼식 올리기 전)이 직접 작위를 받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533년 1월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때 앤은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일 앤 불린은 호화로운 예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했다. 이어 9월 7일 딸 엘리자베스(나중에 Elizabeth I)를 낳았다. 헨리 8세는 실망했으나 아들이 곧 생길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앤이 유산을 반복했고, 부부 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지면서 왕의 마음은 차츰 앤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러면서 그는 앤 불린의 시녀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부터 앤 불린을 경멸하던 헨리 8세의 총리대신(chief minister)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 제인 시무어를 지원하면서 왕비와 불린가의 추락을 부추겼다.
결국 1536년 앤과 남동생(George Boleyn)을 비롯한 몇 명의 귀족 청년들이 간통과 반역, 근친상간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Tower of London)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앤은 주술적 방법으로 왕을 유혹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 썼는데, 이에 대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두 차례에 이어진 재판에서 모두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화형 대상이었으나 왕명에 의하여 참수로 감형되었다.
형이 확정되자 앤은 자신의 시녀(제인 시무어는 아님)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다행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사형 집행에는 당시 흔히 쓰이던 도끼 대신 잘 드는 칼을 사용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를 위해 프랑스로부터 칼을 잘 쓰는 노련한 사람을 데려오기까지 했다.
남동생이 처형되고 이틀이 지난 5월 19일, 앤 불린은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
죽기 전 그녀는 몰려든 사람들에게 국왕에게 힘을 다해 충성해달라는 짧은 연설과 함께 “주님께 제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앤 불린의 사형 집행은 단칼에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