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①] 르네상스 피렌체의 청춘남녀 ‘시모네타’와 ‘줄리아노’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초상. 보티첼리 작, 1480년경, 82 x 54 cm, Städel Museum, Frankfurt

[아시아엔=김인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미술평론가] 초상화 두 점 속에는 흥미로운 관점과 함께 적지 않은 인문학적 스토리가 담겨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피렌체라는 도시국가와 그곳을 지배했던 메디치가(Medici family) 그리고 그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i Piero de’ Medici, 1453~1478).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당시 피렌체 최고의 여인 시모네타 베스푸치 및 피렌체라는 곳과 함께 이들을 존귀하게 여기며 공들여 그림으로 남긴 대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 1510).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는 자신의 출신 가문인 ‘로베레와 리아리오(Rovere and Riario families)’에게 피렌체의 권좌를 안겨주기 위하여 ‘파치가의 음모(Pazzi Conspiracy)’를 주도한다.

그의 교묘한 술책은 피렌체(Florence)의 또 다른 권력가문 파치가(Pazzi family)를 이용하는 것이었고, 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과정은 추기경까지 동원되어, 집권자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물론 그와 항상 행동을 함께 하던 동생 줄리아노의 제거를 목표로 진행되었다.

사건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피렌체의 모든 이들이 좋아하던 줄리아노의 비참한 죽음은 주모자들에 대한 시민들의 응징으로 이어졌다.

줄리아노의 초상, 보티첼리 1478년작, 57.1 x 38.4 cm, Gemäldegalerie, Berlin

그렇다면,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알다시피 로렌초의 동생으로, 집권 메디치 가문은 물론 그들의 도시 피렌체의 ‘총아(寵兒, golden boy)’였다.

언제나 멋지게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지녔고, 성격은 늘 밝았다고 한다. 우아하고 멋진, 그리고 관대한 품성을 지녀 최고의 기사로 불렸다. 그리하여 그는 피렌체 시민의 우상이 되어 ‘젊음의 왕자(il principe della giovenezza, the prince of youthfulness)’라는 또다른 별명도 얻었다.

스포츠에 만능이었고, 야외에서의 생활을 좋아하여 승마, 사냥, 낚시, 결투를 즐겼다.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용히 독서를 하면서 시를 읽었으며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불렀다고 한다. 한마디로 재능과 에너지가 넘치는, 그야말로 르네상스적인 젊은이였다.

그의 형 로렌초(Lorenzo)는 그들의 아버지 피에로(Piero di Cosimo de’ Medici)가 사망했을 때 동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줄이면서 그들 국가의 정치를 책임지려는 자세로 인하여 피렌체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시뇨리아 디 피렌체(Signoria di Firenze, 시 정부)의 대표가 되어 도시에 충성을 다짐하며 시정을 완벽하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런 형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존재가 바로 줄리아노였는데, 그랬던 동생이 음모가 도사리고 있던 미사 도중 칼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이후 이른바 ‘파치가의 음모’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이 피렌체 시민들의 손으로 집행되면서 직접적인 주모자는 붙잡혀 목이 매달렸고, 관련자들이 잇따라 처형되면서 피렌체의 아르노(Arno)강에는 핏물이 넘쳤다.

암살당한 줄리아노는 불과 25세의 나이, 미혼이었다.

당시 낭만적인 존재이기도 했던 그는 자연스럽고 ‘피렌체의 미녀(la bella di Firenze)’로 여겨진 시모네타 베스푸치(Simonetta Cattaneo Vespucci, 1453~1476)라는 여인과 연결되었다.

시모네타와 보티첼리의 이야기는 보티첼리의 명작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 Uffizi Gallery, Florence)’으로 남았다. 그녀는 보티첼리가 평생 운명으로 여기며 그려 남긴 모델(실제로는 귀족 여인)이기도 했다.

줄리아노의 시모네타 연모(戀慕)는 그녀가 정략적으로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결정했을 때까지도 줄어들지 않았다. 시모네타가 1476년 불과 23살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식음을 전폐했을 정도로 상심에 빠졌었다.

한편, 결혼하지 않았던 줄리아노에게는 피오레타 고리니(Fioretta Gorini)라는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아들 줄리오(Giulio)가 있었는데, 아이는 아버지의 비극적 죽음 한달 후 세상에 태어났다.

소년 줄리오는 큰아버지 로렌초와 큰어머니 클라리체(Clarice)의 사랑과 양육 속에 훌륭하게 성장하여 나중에 교황 클레멘트 7세(Pope Clement VII, Giulio de’ Medici, 1478~1534)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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