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26] 日 ‘서양화 아버지’ 쿠로다 세이키 ‘호숫가에서’

호숫가에서(湖畔, Lakeside), 쿠로다 세이키(Kuroda Seiki), 69 x 84.7 cm, Kuroda Memorial Hall(黒田記念館), Tokyo

일본 서양화가 야먀모토 호수이(Yamamoto Hōsui, 山本芳翠)와 그의 그림(西洋婦人像, 1882, 東京芸術大学 美術館)을 소개하면서 또 다른 서양화가 쿠로다 세이키(Kuroda Seiki, 黒田清輝, 1866~1924) 역시 언급했었다.

쿠로다 세이키는 어쩌면 야마모토 호수이보다 더 비중있던 서양화가로, 심지어 일본 서양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그런 관점은 한국의 서양화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설립했던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졸업생 중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두 사람, 즉 고희동(高羲東, 1886~1965)과 김관호(金觀鎬, 1890~1959)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쿄미술학교의 1915년 졸업생 중 김관호는 수석을 차지했다고 한다.

김관호가 그린 한국 최초의 누드 서양화 ‘해질녘'(夕暮, 夕ぐれ, 1916, 도쿄예술대학 미술관)은 스승 쿠로다 세이키의 누드화 ’아침 목욕'(朝妝, Morning Toilette, 1893, 유실됨)과 여러모로 분위기가 비슷한 작품으로, 스승의 영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쓰마 현(지금의 카고시마 현)의 타카미바바 지역 유력 사무라이 가문 출신이었던 쿠로다 세이키는 일본에 서양 미술의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 작가이자 미술교육자였다. 10대 때부터 영어를 배우면서 대학 입학을 준비했으나 곧 프랑스어로 바꾸었고, 1884년 매형이 프랑스 외교 사절이 되면서 법학 공부를 하기 위하여 파리로 함께 떠났다. 그리하여 그와 부인을 포함한 가족은 이후 10여 년 그곳에 머물렀다.

쿠로다는 어린 시절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이 있어서 파리로 가면서도 수채화 도구를 지니고 갔지만 취미로 생각했지, 실제 미술을 전공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1886년 파리의 일본 외교 사절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하여 당시 그곳에 와서 그림을 배우던 야마모토 호수이와 후지 마사조(Fuji Masazō, 藤雅三)와 우키요에 전문 미술상 타다마사 하야시(Tadamasa Hayashi, 林忠正)를 만났다.

그는 이들과 함께 미술에 큰 관심을 공유하면서 고국의 문화 발전을 토론했는데 이때 쿠로다는 법학 공부보다는 차라리 미술 전공으로 바꾸는 게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법학과 함께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그 후 1886년 5월부터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 라파엘 콜랭(Raphaël Collin)의 화실에 등록하여 본격적인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피에르 퓨비 드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로부터 인간의 몸에서 시작하여 추상으로의 표현하는 방법 등도 배웠다.

같은 해 막 파리에 도착한 쿠메 케이치로(Kume Keiichiro, 久米桂一郎)라는 젊은 화가 역시 콜랭의 화실에 등록하면서 둘은 친구이자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때 그들은 아카데미의 기본적이며 전통적인 기법을 충실히 따르면서 한편으로 외광파 회화(plein-air painting)를 알게 되었다.

1890년 쿠로다는 파리 남쪽 70km 떨어진 그레술루앙(Grez-sur-Loing) 마을로 가서 그곳 화가 집단(colony)에 모인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외광파 회화에 매우 익숙해졌다. 1893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누드 회화인 ‘아침 목욕’을 그렸는데 이는 실물 크기였고, 전시회에 출품되어 국립미술학교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쿠로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누드화에 대한 편견을 잠재우고자 작품을 미국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국내로 반입했지만,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때 유실되고 만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바로 쿄토로 가서 외광파 기법으로 전통적 마을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귀국할 무렵 일본의 서양화는 국가의 지원을 받은 이탈리아 화가 안토니오 폰타네시(Antonio Fontanesi)가 1876년부터 코부 미술학교(Technical Fine Arts School, Kо̄bu Bijutsu Gakkо̄)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때 그가 소개한 서양화 스타일은 바르비종(Barbizon)파의 것이었다.

한편 1894년, 야마모토 호수이가 만들었던 미술학교(Seikо̄kan, 生巧館)를 이어받은 쿠로다는 학교 이름을 텐신도조(Tenshin Dо̄jо̄, 天心道場)로 바꾼 후 외광파 위주의 서양화 교육을 위한 장으로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1896년은 그의 경력에서 정점에 오른 해로, 이때 도쿄 미술학교(현재의 국립 도쿄 예술대학)의 학장이었던 오카쿠라 텐신(Okakura Tenshin, 岡倉覚三)이 쿠로다를 새롭게 만들어진 서양화과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교육과정을 보다 광범위하게 만들면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고자 힘을 썼고, 특히 야외 사생과 함께 누드 소묘를 중점적으로 강조했다.

쿠로다 세이키 만큼 현대 일본 미술에 큰 영향을 준 화가는 거의 없다. 화가로서 그는 일본의 일반인에게 서양화를 처음 소개한 사람이었으며, 교육자로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자신이 파리에서 배운 것들을 열심히 전수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와다 에이사쿠(Wada Eisaku, 和田英作)와 같은 화가들(한국 출신 작가들 포함)이 있었으며, 또한 많은 학생이 쿠로다에 이어 파리 유학을 선택하면서 20세기 일본 미술인들이 서양 미술의 광범위한 경향을 충분히 인식하며 작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작품은 1967년 일본 우표로 공식적으로 인쇄되었던(그 외에 한 작품은 1980) 것으로, 쿠로다 세이키를 국내외적으로 나타낸, 그의 정체성을 알렸던 그림이다. 전체 화면에는 연한 초록과 파랑, 옥색의 하모니가 부드럽게 펼쳐지는데 그것들은 뒤에 보이는 배경과 함께 모델이 입고 있는 옷에서도 관련 색상이 묻어난다.

그러면서 여인이 시선을 두고 있는 화면 오른편에는 반원에 가까운 커다란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안에 자신만의 상념을 남겨놓게 하는, 어떤 이끌림 또는 명상(冥想, meditation)을 유도하고 있는 듯하다. 모델, 즉 그녀가 입은 옷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일본에서 이루어졌던 인상파 회화의 또 다른 전형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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