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25] 초현실주의 키리코 ‘사랑의 노래’

‘사랑의 노래'(73 x 59.1 cm), Giorgio de Chirico, 1914, 73 x 59.1 cm,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NY

사유(思惟, reason)는 복합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그런 사유의 장을 이미지로 나타낼 때 단순하게 마무리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간단하게 정리되었다면, 그때는 사유가 아닌 주장(主張)이 된다.

우리는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쉽게 손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들은 바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등이다.

한편, 추상미술을 처음 그린 두 작가는 누구였던가. 바로 뜨거운 추상을 그렸던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차가운 추상을 만든 네덜란드의 피엣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그들이다.

그들 두 추상화가처럼 초현실주의에 정열적인 분위기를 이룩한 화가가 달리였고 반면에 냉정한 분석을 만든 이가 벨기에 출신의 마그리트였다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원시적인 상태의 문학과 미술을 재조명하면서, 무의식(無意識, Unbewusste, unconsciousness)의 세계를 현실 속에 나타내려 했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작가란 자신의 내면에서 보이는 것은 뚜렷한 윤곽으로 그려내거나 투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무의식, 꿈, 환상의 세계를 탐색하면서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비이성적인 것들, 무의식의 세계들을 그리거나 써 남겼다.

따라서 그런 작업을 위하여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정신분석을 교본(text)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20세기 초 다다(Dada)가 이룩했던 무가치, 무의미, 완전 부정에 가까웠던 문학과 미술을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재조립한 모습이 바로 초현실주의였다. 그리하여 사유 역시 다다 보다는 많은 계층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회화 세계에서 복잡한 사유 단계를 무책임하게 정리한 사람들 역시 달리와 마그리트였으며, 초현실주의는 마치 그들로 인하여 마무리된 것처럼, 즉 그들을 알면 초현실주의를 이해한 것, 완전 정복한 것으로 여기는데 이는 잘못이다.

그런 생각은 달리와 마그리트가 어쩌면 대중과 야합(野合)했던 자세와 더 이상의 진전 없이 말초적인 시각적 농단을 일삼았던 데에 기인한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에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처럼 파고들어 캐내야 할 이론적 과정이 아직 많다. 그런 예는 초현실주의 문학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문학에서의 초현실주의와 비교하여 미술의 초현실주의는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듯하여 어쩌면 무책임하다는 느낌인데 그런 기여 역시 달리와 마그리트가 담당했던 것 아닌가.

글이 길어지는데 달리와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를 결국 상업적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심하게 말하여 질서를 어지럽힌, 즉 쓰레기를 버리고 휴지통에 담지 않은 식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보고자 하는 이탈리아 초현실주의 화가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작품을 비롯하여 그가 남긴 작품들 모두 복합적 사유를 담고 있는 까닭에 진정으로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키리코가 이룬 것 같은 초현실주의를 나타낸 작가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달리와 마그리트의 상업적 패악질에 역겨움까지 느끼게 된다. 그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해놓은 것인가?

다다와 초현실주의 시기 그들이 활약하던 파리, 취리히, 베를린 등지에서는 문학인과 미술인의 구별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로의 예술 세계를 공감하면서 격려하고, 비판하면서 그들은 함께 지냈다. 역사상 미술과 문학의 근접과 동일체는 아마 그때가 유일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지금 보고 있는 작품과 관련하여 작자인 키리코가 분홍의 혹은 빨강색 고무장갑을 구입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무시무시한 힘, 즉 인간이라는 존재를 진정으로 나타내는 ‘손(hand)’을 나타내면서도 그와는 완전 반대로 비인간적이며 뚜렷하게 나타나는 살이 없이, 축축하고 축 늘어진 표피적인 사랑의 노래라는 고무장갑의 모습을 예견했다.

아울러 그는 무슨 까닭으로 병원 수술복이 이미 고전 시기로 분류되어 멀리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유물과 다름없는 고전 조각상을 모사한 두상 석고와 함께 판자나 캔버스에 고정되어 나타났는지 그 근원적 공간을 주목했다. 그러면서 그는 관련 의문과 함께 나름의 해석을 이어갔다. 녹색 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건물과 멀리 지나는 기차가 암시하는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공간 전체의 앙상블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결코 공통점을 유추할 수 없는 각기 다른 물건들의 만남은 현대 미술을 향한 강력한 주제가 될 것 같지 않았지만, 키리코는 초현실주의를 굳이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지향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두고 아폴리네르는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al)’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키리코의 목표는 물건 겉모습을 넘어 그것에 숨겨진 본질적 현실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불안과 우울한 분위기로 뒤덮인, 키리코가 해석해 낸 유사 인간(humanoid)적인 형태, 온통 공허해 보이는 건축물, 그림자만 보이는 통로, 기괴하게 길게 뻗어 이어지는 거리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여러 갈래로 찢겨버린 세상이 심오한 부조리 속임을 의미심장하게 나타낸다.

그렇게 하고자 1910년, 키리코는 일상적인 의식이 정지되고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시작하는 삶의 불가사의한 순간으로부터 영감을 받으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키리코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 화가 카를로 카라(Carlo Carrà)를 만난 후 그러했던 의식을 담은 작업을 ‘형이상학 회화(形而上學繪畫, Pittura Metafisica)’라는 운동으로 함께 발전시켰다.

그들을 비롯한 몇몇 미술인들은 현대적인 배경의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그들만의 독특한 구조의 특이한 도상학(iconography)이 병치 되어 보는 이들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유럽이 1차 세계대전과 그 어려움으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에 고립되어 더 이상의 진전이 정지되고 말았다.

이 그림은 거의 도식적인 건축 장면 안에 빨간색의 고무로 된 수술용 장갑, 녹색 공, 그리스 예술의 신 아폴로(Apollo)의 머리라는 조각상 등으로 놀라운 병치를 결합하고 있다. 마치 벽에 걸린 트로피나 작품처럼 요소들의 대비는 놀라움뿐 아니라 표면 아래 어렴풋이 다가오는 또 다른 현실감을 전달한다.

작가는 고전적인 파사드(façade)를 열어버린 어두운 아치와 같은 전통적인 건축 모티프를 되돌아가는 과거라는 의미로 사용했으며, 왼쪽의 낮은 수평선을 따라 묘사된 기차는 이제 종종 되돌아오는 현대적이라는 제재(題材)로 나타냈다. 즉 완전히 다른 요소들의 병치로 인하여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면서 그런 인간 내면의 의식구조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1964년, 같은 그림을 소유했던 레오네 암브론(Leone Ambron)이 피렌체의 피티궁전(Palazzo Pitti)에 기증하여 그곳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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