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철의 미술산책 24] 400년 전 루벤스의 탁견, 역병·기근 그리고 ‘전쟁의 결말’

피터 폴 루벤스 작 ‘전쟁의 결말'(Consequences of War) 1637-1638, 206 cm × 345 cm, Palazzo Pitti, Florence

루벤스의 ‘전쟁의 결말’ 그림에는 마치 물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화면 왼쪽에서 밀려든 물결에 오른쪽으로 떠밀려가는 듯한 몸짓이 나타나 있다. 동시에 어떤 극적인, 긴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화면 속 중심인물은 전쟁의 신 마르스(Mars)로, 그는 지금 로마의 관습에 따라 평화로울 때는 닫혀 있는 야누스(Janus) 신전을 스스로 열어버린 후 방패와 피로 물든 칼을 들고 자신을 말리러 다가온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주변에는 사랑의 신 아모스(Amors)와 더불어 큐피드(Cupids), 사랑의 행위 즉 포옹과 애무로 그를 진정시키려는 비너스(Venus) 등이 총동원되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이어지는 오른쪽 화면에서 마르스는 분노에 차 횃불을 들고 있는 알렉토(Fury Alekto)에 의하여 끌려 나가고 있다.

근처에는 마르스(전쟁)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는 역병과 기근을 의인화한 괴물들이 보인다. 땅에는 등을 돌리고 마르스의 불협화음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하모니(Harmony)가 그녀를 상징하는 부러진 류트(lute)를 들고 누워 있다.

그 옆 아이를 품에 안고 보호하고 있는 듯한 어머니는 다산, 출산, 사랑 등 모든 것을 부질없게 만들고 심지어 파괴하는 전쟁(마르스)으로 인하여 심각한 위험에 빠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평화롭게 살고자 장식까지 만들어 조성해 놓은 사람 사는 도시(city)가 전쟁이 벌어져 마구 휘두른 무기, 돌 같은 것에 의하여 처참하게 파괴된다는 경고를 위하여 손에 측정도구 같은 것을 들고 바닥에 누워 허우적거리는 건축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마르스의 발은 책과 종이 위의 그림 등을 마구 짓밟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 모든 예술과 학문을 망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왼편 바닥에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평화로울 때의 화합(Concord)을 상징해야 하는 활과 화살의 끈이 풀려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평화의 전령(messanger) 헤르메스(Hermes)의 쌍날개 지팡이(caduceus)와 올리브 가지들 역시 버려져 있다.

찢어진 베일에 검은 옷을 입고 모든 보석과 기타 장식품을 강탈당한 상태로 비탄에 잠긴 화면 왼편 가운데에 서 있는 여인은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약탈과 위협이라는 불행을 겪은 유럽(Europe)의 모습이다.

이제 더이상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이 유럽의 속성은 작은 천사들이나 왼편 구석의 어린 천재(genius)가 십자가를 지거나 들고 기독교 세계를 상징하는 둥그런 세계(球, globe)로 표현되고 있다. 즉 기독교 신앙으로만 궁극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작자인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30년 전쟁(1618~1648)을 살펴보며 정리하던 도중 1638년과 1639년 사이에 지켜본 전쟁의 결과를 캔버스에 담았다.

당시 전쟁의 갈등과 원인은 복잡하고 다양했지만, 골자는 바로 개신교와 카톨릭 세력 사이의 뿌리 깊은 적대감에 있었다. 아울러 유럽의 정치권력 투쟁은 관련 전쟁을 더욱 부추키며 연장시켰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마치 경쟁하듯 오랜 전쟁에 빠져들었다.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폴란드, 오스만제국, 신성로마 제국 등이 관련되었다. 특히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가의 경쟁, 즉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적대감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작품 ‘전쟁의 결과(Consequences of War)’에 나타난 것처럼, 결국 전쟁은 유럽의 넓은 지역을 파괴하고 역병과 기근을 발생시켰다. 결과적으로 상당한 인구 감소를 겪게 되는 독일에서 주로 벌어진 30년 전쟁은 1648년 오스나브루크(Osnabruck), 뮌스터(Münster) 조약과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으로 끝이 났다.

작자 루벤스는 위대한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열정적이고 능숙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Queen Isabella)과 스페인령 네덜란드(당시 네덜란드 연방과는 다른)와 긴밀한 동맹을 맺은 관계 속에, 궁정화가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나라를 다녀 볼 기회가 있었다.

만토바 공작, 필립 4세, 찰스 1세, 마리아 데 메디치 등과도 관련이 있었던 그는 일반적인, 그리고 큰 틀의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평화와 대의를 위하여 프랑스, 영국과도 긴밀한 협상력을 발휘했다.

실제 루벤스는 상당한 열정과 노련한 능력으로 30년 전쟁의 종식을 위하여 막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그는 스페인으로 하여금 스페인령 네덜란드인들에게 그들의 노선을 따르도록 독려하는 한편으로,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적국인 스페인과 영국 사이의 평화를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립 4세와 찰스 1세 사이에서 전언, 요구 및 양보 등의 과정을 거쳐 결국 합의 협정을 만들어냈다. 그의 그러한 외교적 업적으로 이사벨라 여왕에 의하여 ‘왕실의 신사(gentleman of the household)’라는 공식 칙령을 받았고 찰스 1세에 의해서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화가이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외교관이라는 그의 독특한 위치는 결국 이렇게 ‘전쟁의 결과’를 분명히 알려 주는 작업으로도 눈부시게 발휘되었다.

작품은 평화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열망과 함께 전쟁이 유럽을 어떻게 유린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관여했던 여러 외교적 능력으로 유럽 대륙의 실상과 전쟁이 초래했던 결과를 화면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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