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세계사⑥] 붉은 장미 손에 든 매리 1세

 매리 1세의 초상(Mary Tudor), Anthonis Mor, 1554, 109 x 84 cm, Museo del Prado, Madrid

순진무구했으며 인문학적으로 수양이 잘 된 여인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 자리는 매리 1세의 차지였다.

매리 1세(Mary I, Mary Tudor, 1512~1558)는 부왕 헨리 8세(Henry VIII)와 스페인 출신의 모친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했던 어머니로 인하여 부왕 헨리 8세가 어머니의 시녀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과 무리한 재혼을 시도하면서 그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불행하게 꼬여버린다.

그녀는 잉글랜드를 다스린 최초의 여왕으로, ‘피의 매리(Bloody Mary)’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다.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감, 그리고 굳건한 카톨릭 믿음을 가졌던 나라 출신이었던 어머니로 인하여 그녀 역시 카톨릭을 매우 신봉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 의하여 무력화되어 거의 무너져가던 카톨릭 부흥을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신교도들을 박해하고 처형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무시무시한 별명이 만들어졌다.

첫 아이로 태어난 그녀는 학구적인 자세와 명랑한 소녀로 자라면서 어머니와 궁정의 귀족들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는데 잉글랜드가 보다 힘 있는 국가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 강대국 왕가와 결혼을 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당시 서유럽 여러 왕실에서 주변국과의 정략적 혼인은 관례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4촌 관계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Charles I of Spain)와 약혼했던 그녀는 막대한 현금 지참금을 준비하여 스페인으로 오라는 일방적 요구를 받았지만, 잉글랜드 왕국은 이를 무시하고 말았다.

그리고 부왕에 의하여 1525년 웨일스의 공주(Princess of Wales)로 지명되면서 그녀의 지위 상승은 더 없었고, 반대로 아버지가 새 왕비 앤 불린을 맞아들임에 따라 공주라는 지위의 파기로 이어졌다. 게다가 카톨릭 폐지에 의하여 엄연히 잉글랜드 국교가 성립되었음에도 카톨릭 신앙을 버릴 수 없던 그녀는 결국 서자(庶子)로 신분이 절하되었다.

새 왕비 앤 불린은 평소 매리의 행동을 낯낯이 살피면서 견제했고, 매리는 혹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면서 수녀원으로 도피할 생각까지 했으나 당시 카톨릭 수도원들 역시 큰 변화 속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드디어 헨리 8세의 앤 불린에 대한 사랑이 인내라는 터널을 지나 증오로 바뀌었고, 결국 앤 불린과 불린가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 처형되면서 매리의 신분도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나아가 그녀는 당시 유럽의 공주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어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되었는데, 이무렵 부왕이 캐더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와 다시 결혼하면서 이를 계기로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이후 1547년 제인 시무어(Jane Seymour)가 낳은 왕자 에드워드 4세(Edward IV)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553년 그가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느닷없이 제인 그레이가 국왕이 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비록 제인 그레이의 재위는 불과 며칠 정도였지만, 이때 잉글랜드 전체가 매리의 왕위를 원하는 소용돌이에 빠지면서 결국 매리 스스로 런던에 입성하여 왕위를 차지했다. 이때 그녀 나이 37세로 강직하고 당찬 믿음의, 솔직하고 진실된 면모는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는 잔인한 처벌과 복수를 원치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 문제에 관해서 그녀는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새롭게 즉위한, 즉 왕국 최초의 여왕이라는 자리부터 잘 살폈어야 함에도 그녀는 우선 백성들이 카톨릭 신앙부터 믿어야한다며 조바심을 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성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Charles V) 또는 나이가 열한 살이나 어린 황제의 아들인 스페인의 필립 2세(Philip II of Spain)와의 결혼을 결심했는데, 이때 궁정의 대신들 대부분은 왕족의 혈통이자 4촌 관계인 데본 백작 코트니(Courtenay, earl of Devon)를 추천했다.

게다가 부왕 헨리 8세가 카톨릭 수도원 등의 모든 재산을 몰수한 결과 부와 토지를 얻었던 잉글랜드 귀족들은 그렇게 받은 재산 등에 대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했으며, 그런 와중에 카톨릭을 국교로 복원하려는 매리의 강렬한 의지가 결국 그들을 적대 세력으로 만들어버렸다.

아울러 의회 역시 매리가 의도한 스페인 왕가와의 결혼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태도로 나오자 여왕은 “나의 결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이다(My marriage is my own affair.)”라며 극도의 분노를 표출했다.

1554년 그녀가 스페인의 필립과 결혼이 분명해졌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토마스 와이어트 경(Sir Thomas Wyat)이 이끄는 개신교도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런던을 향한 그들의 진격에 놀란 매리는 수천 명의 시민들을 모아놓고 자신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멋진 연설을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반란은 격퇴되었고 주도자 와이어트는 결국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필립과 결혼한 매리 국왕은 다시 카톨릭 신앙을 회복시키면서 다른 종교에 반대하는 법을 부활시켰다. 이후 3년 동안 종교적 반란자들이 가차 없이 처형되면서 거리에는 시신들이 연달아 말뚝에 매달려 있었고, 약 300명이 화형에 처해졌다. 결국 ‘피의 매리 여왕(Bloody Mary)’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만들어지면서 국민들의 적지 않은 반감까지 일어났다.

또한 외교와 전쟁의 실패로 잉글랜드가 유럽 대륙으로의 교두보로 갖고 있던 칼레(Calais)를 영원히 잃는 일까지 벌어졌다. 몇 번의 유산(流産)으로 자식까지 없었던 그녀는 병까지 얻으면서 비탄에 빠져갔다. 그녀의 병은 난소종양이었고 이는 얼마 살지 못하는 상태였다.

여왕은 어머니를 궁정에서 내쫓아버린 앤 불린의 딸이자 이복 여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Elizabeth I)를 매우 미워했다. 어린 엘리자베스의 세례성사 자리에서 서자로서 보좌할 것을 명령받았던, 치욕으로 시작된 원한은 뿌리가 깊었다. 게다가 앤 불린이 처형될 때 매리는 엘리자베스의 하녀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혈육이라곤 엘리자베스 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죽기 전날 자신의 후계자로서 여동생을 지명했다.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매리 1세는 5년 남짓 재위한 후, 난소암에 걸려 1558년 11월 17일 세인트 제임스 궁(St James’s Palace)에서 세상을 떠났다.

매리 여왕의 기일(忌日)은 이후 200년간 종교적 압제에서 해방된 축일로서 기념되었다. 매리 여왕의 초상화는 재위 기간 그려진 것으로, 그녀의 말년 모습이다. 병과 더불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얼굴에는 아직 강한 의지와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손에 들고 있는 장미 한 송이는 자식을 두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아직 힘이 미약하다고 여기는 그녀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녀는 적지 않은 초상화를 남겼는데 표정들을 보면 한결같이 굳건하다. 그런 자세가 후임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이어진 것 아닐까.

네덜란드 출신의 초상화가 안토니스 모르(Anthonis Mor, 1517~1577)는 유럽 여러 나라의 궁정에서 초상화를 그렸고 1553년 필립 2세에 의하여 궁정화가로 위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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